교직의 첫 출발 - 박종권의 사담기
교직의 첫 출발 - 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19.06.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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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35
교원자격증(박물관 기증사진)/1964. 9. 25일자 문교부장관 명의로 발급된 교원자격증(일반사회 준교사) 사본, 필자가 교직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
교원자격증(박물관 기증사진)/1964. 9. 25일자 문교부장관 명의로 발급된 교원자격증(일반사회 준교사) 사본, 필자가 교직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

얼마 전 안법110주년 기념 콘서트가 안성맞춤 아트 홀에서 성대하게 열린 적이 있다. 이 행사는 안법고등학교의 전신인 안법(安法)학교1909년에 설립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필자는 1954년부터 60년까지 안법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일이 있고 또한 모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은바 있기 때문에 학교 110년 역사의 한 부분을 지나간 셈이 된다.

196492학기에 안법중고등학교(병설) 강사로 교직의 첫 발을 딛게 되었다. 같은 해 2월에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교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첫 출발을 하게 된다.

일반대학 졸업생도 교사 자격증을 신청할 수 있어, 서울 을지로에 소재한 경기도교육위원회를 찾아가 교원 자격증(준교사)을 발급 받을 당시만 해도 공부를 더 할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를 결정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안법중고등학교는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현 광암학원) 소속으로 안성성당 주임신부가 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필자는 대학 재학 중에도 방학 때면 성당에 내려와서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곤 하였던 적이 있었다.

안법 가족음악회 기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1965. 5. 27일 안법중고 가족음악회를 마치고 현관에서 부부동반으로 함께 찍은 기념사진(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신원식 교장신부,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장덕호 보좌신부. 뒤에서 셋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필자임)
교직원 부부동반 기념사진(박물관 기증)/1968. 5월 가정의 달 행사를 마치고 학교 현관에서 부부동반으로 찍은 기념사진(앞에서 둘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필자 부부)

고향에 내려온 필자를 다시 만난 성당 수녀님들이 무척 반가워했다. 교장을 겸하고 있던 강주희(방그라시오) 주임신부 추천으로 교직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본래 목표는 아니었어도 모교 교원으로 근무하게 된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학교는 한마디로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대단히 좋았다. 과거에 가르침을 주셨던 중고등학교 은사님들이 계셔서 바른 길을 배우게 되었고 모교 선배 교사들이 친절하게 이끌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출근한 첫날, 필자가 중학생 때부터 교감으로 계셨던 권병곤 은사님을 비롯하여 이춘택(역사)선생님, 김승환(음악)선생님, 유인식(영어)선생님 등 은사님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주셨던 장면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수업을 하기위해 교실에 들어가서 만난 학생들도 모교 후배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그런지 모두 친밀하게 느껴졌다. 비록 새내기 교사였지만 강의도 잘되었고 유머를 섞어가며 가르치는 여유도 찾을 수 있었다.

온양관광호텔 오찬회(박물관 기증사진)/1965. 5. 1일 교직원 연수 장소인 온양관광호텔 식당에서 부부함께 식사하고 있는 모습(필자는 미혼)
온양관광호텔 오찬회(박물관 기증사진)/1965. 5. 1일 교직원 연수 장소인 온양관광호텔 식당에서 부부함께 식사하고 있는 모습(필자는 미혼)

초임 시절에는 학년별 학급수가 불과 2학급씩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부분 교사들이 전공과목과 유사한 과목이나 상치과목을 배정 받아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실정이었다.

필자가 당시 가르쳤던 과목은 중학교 1학년 지리, 2 역사와 영어(부독본), 3 공민(公民)과 도덕, 고등학교 윤리 등이었다. 다소 부담이 되었으나 적성에 맞았는지 모두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년 쯤 지났을 때, 같이 공부하던 동급생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느니 총학생회를 함께하던 친구는 S그룹에 특채되어 갔다느니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많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교직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1965년 말까지 1년여 남짓 근무하는 동안, 존경하는 은사님과 고교선배들과 함께 모교에서 시작한 교직 생활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보람이었다.

사정에 의하여 강사직을 내려놓고 잠시 학교를 떠나 안성군청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 학교에서 사회과(일반사회)교사 정규 TO가 났으니 다시 정교사로 복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안성군청 근무당시/1967. 12. 10일 안성군청 공보실에 근무할 당시 윤석범 군수 송별기념으로 함께 찍은 군청직원 일동 사진(앞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앉아있는 모습이 필자임)
안성군청 근무당시/1967. 12. 10일 안성군청 공보실에 근무할 당시 윤석범 군수 송별기념으로 함께 찍은 군청직원 일동 사진(앞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앉아있는 모습이 필자임)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교직에 진출하게 해준 모교의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1966(27) 결혼 후 가장이 되어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입장에서 당시 공무원 월급의 약 두 배인 교사 봉급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가톨릭 학교인 경주 근화여중고교 설립자 겸 교장에서 1964년에 안법중고교로 부임한 신원식(루카) 교장신부는 라틴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가 유창하고 작곡과 피아노 연주까지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하였다.

교육방침으로는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성실, 노력, 우애를 교훈으로 제시하였다. 수업의 질을 높이려는 생각으로 결원이 나면 S대 출신 등 우수교사들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교장신부는 학생미사 전례(典禮) 중에 인성지도는 물론 세계를 향한 꿈을 갖도록 배려하였고 교내 음악회를 자주 열어 특기를 살려주면서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청소년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도 하였다.

청소년 생활윤리(에티켓) 특별교육에 관심이 컸고 특히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들에게는 양손을 사용하는 양식(洋食)을 코스별로 식탁에 세팅하여 놓고 실습했던 추억담은 졸업생들의 유명했던 일화였다.

교원들을 존중하여 모든 학교행사에는 가족들을 초대하였으며 특히 5월 가정의 달엔 부부동반 음악회,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 한껏 즐기게 하였던 추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교직원 소풍(박물관 기증사진)/교직원 연수가 끝난 후 온양관광호텔 야외 뒷동산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는 모습
교직원 소풍(박물관 기증사진)/교직원 연수가 끝난 후 온양관광호텔 야외 뒷동산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는 모습

처음에는 검은 사제복을 입은 키 큰 교장을 모두 어려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마다 이어지는 교직원 회의는 교감에게 일임하고 교사들이 자율적인 모습으로 수업에 임하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교사 생일 때에는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라는 쪽지와 함께 작은 선물과 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와 교사들을 감복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제도에도 없는 보너스를 처음으로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필자가 이러한 에피소드를 떠 올리는 이유는 교직에 첫 발을 내 디딘 모교에서 교장신부와 은사를 통하여 교육자로서 걸어가야 할 사랑의 길을 몸으로 터득한 기회였었다고 회고되기 때문이다.

안법 가족음악회 기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1965. 5. 27일 안법중고 가족음악회를 마치고 현관에서 부부동반으로 함께 찍은 기념사진(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신원식 교장신부,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장덕호 보좌신부. 뒤에서 셋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필자임)
안법 가족음악회 기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1965. 5. 27일 안법중고 가족음악회를 마치고 현관에서 부부동반으로 함께 찍은 기념사진(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신원식 교장신부,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장덕호 보좌신부. 뒤에서 셋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필자임)

사범대가 아닌 일반대학 출신으로 교직을 출발하였기 때문에 교직과정도 밟지 않았고 교생실습도 거치지 않아서 참다운 교직관, 올바른 교직윤리가 무엇인지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는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직업 또는 직종 중에서 교원을 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생관 정립에도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흔히 교직이라는 직업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직관, 근로직관, 전문직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하지만 어느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판단된다.

교원의 특수성은 교직에서 애타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명확한 직무 한계에서 자율성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오한 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연찬하여 확고한 신념을 갖고 고도의 교직윤리 실천이 필요하게 된다.

선진지 학교 방문/1970년대 초 선진지 가톨릭 학교인 경주 근화여중고를 방문하여 이 학교 설립자이며 초대교장이기도 한 신원식 교장신부와 권병곤 교감 및 교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선진지 학교 방문/1970년대 초 선진지 가톨릭 학교인 경주 근화여중고를 방문하여 이 학교 설립자이며 초대교장이기도 한 신원식 교장신부와 권병곤 교감 및 교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무엇보다 교사는 학생을 잘 이해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일 자체에 대하여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교사이어야 한다. 학생을 사랑하려면 그 대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젊은 교사시절에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우열적 상하관계가 아니라 진리와 삶앞에 적나라하게 서있는 동등한 구도자(求道者)의 관계(M. Buber)”라는 신념을 스스로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학생지도에 정진하였다.

학생과 교사가 만나는 자리는 교육학적 만남의 특수형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만남 즉 인격적 만남이다. 바람직한 사제관계는 서로 일깨움을 주고받음으로써 진리의 공동생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양과 인품에 영향을 받아 부지불식간에 인격적 감화를 받게 된다. 사랑을 먹고 튼튼하게 자라게 된다.

사도(師道)구현, 스승의 길은 과연 무엇인가?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이 무엇 때문에 나오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

어느 교육 비평가의 저서 많이 가르치고도 실패하는 우리나라 교육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원로 교육인 으로서 오늘도 성호(聖號)를 그으며 고백의 기도를 바친다.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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