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 안성관련 신문 읽기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 안성관련 신문 읽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5.0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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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라 빼앗겼어도 안성에서는 의병이 활동했다 - 1910년 11월 안성 관련 기사
1910년 11월 8일 3면1단 기사 - 양지군 적경
1910년 11월 8일 3면1단 기사 - 양지군 적경

 

191011831단 잡보 - 양지군적경

일전에 적당 수십명이 양지군 고동면 봉지곡 최**씨 가에 돌입하야 전재를 토색하다가 최씨를 즉지타살고하고 해 동리를 충화몰소 하얏다는대 전동 안**씨의 소유 추수곡 오십석도 역위몰소 하얏다더라.

 

이번에는 191011월 매일신보에 게재된 안성관련 기사를 소개하겠다.

확인된 기사는 모두 5건인데 먼저 118일자 기사는 주목해야 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적당 수십명이 양지군 고동면 봉지곡 최**씨와 안**씨 등 집에 돌입하여 재산을 빼앗고 마을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쓰여진 시점이 일제 강점기 임을 감안할 때 적당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도적떼라 하지 않고 적당이라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실 도적떼라 해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제의 입장에서 적당이라 함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독립군내지 의병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기사에 등장하는 주민의 재산을 빼앗고 마을을 불태웠다는 기사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독립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친일파의 재산을 빼앗은 것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기자도 여러 기회에 다른 지면에서 기사화 한 적이 있고, 안성의 의병운동과 관련된 여러 연구에서 대한제국 시절 안성지역의 의병운동은 다른 어느지역에 못지 않게 치열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안성에서 의병운동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양지군 고동면 봉지곡은 지금의 고삼면 쌍지리 봉지곡과 정동마을이다.

1910년 11월9일 1면 2단
1910년 11월9일 1면 2단

191011912단 인사 조선총독부관보: 서임급사령

명치43101

조선총독부 군수 최태현 경기도 안성군 재근을 명함

조선총독부 군수 이윤영 경기도 죽산군 재근을 명함

조선총독부 군수 김우식 경기도 양지군 재근을 명함

조선총독부 군수 정영택 경기도 양성군 재근을 명함

 

119일과 1115일에는 각각 101일자로 실시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인사내용을 그대로 게재했다.

당시 인사내용은 군수에 대한 것이었는데 안성과 관련된 지역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의 군수를 그대로 유임시키는 내용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후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상태라 기존 임명된 군수들을 그대로 유임시켜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일제의 자신감과 함께 또 한편에서는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는 나름대로의 통치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고 앞으로 이야기했듯이 양성의 정영택 군수같은 경우 이러한 일제의 통치정책에 파열음을 내는 행보를 취한다.

1910년 11월 13일 2면 5단
1910년 11월 13일 2면 5단

1910111325단 잡보: 각군의 사환미면제

장단, 이천, 수원, 안산, 안성, 교하, 양천, 양지 등 각 군수는 거 829일에 반포한 합병에 대한 조칙(詔勅)을 의거하야 각 해군 인민에게 사환미를 일일 면제하얏다고 해도장관 회원직우(檜垣直右)씨에게 보고하얏다더라

 

1113일자에 실린 기사도 일제의 통치정책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기사여서 흥미롭다.

즉 일제는 합병 조칙에 사환미를 면제하겠다는 조항을 넣었고, 이를 각 군수가 실행에 옮겼다는 내용이다.

사환미는 환곡으로 잘 알려진 제도로 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돌려받던 빈민구제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르면 이러한 환곡제도는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삼정의 문란중 하나로 전락했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퍼진 농민항쟁과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한제국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노력의 일환으로 환곡제도의 명칭을 1895년에 사환미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에 등장하는 것은 국권을 침탈한 일제가 민심을 얻기 위해 사환미를 모두 면제하겠다고 약속했고 안성, 양지 등에서 발빠르게 이를 시행했다는 내용이다.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당장 입에는 달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이렇듯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민심을 얻기 위해 단골로 써먹던 수법이기도 하다.

1910년 11월 21일 2면 5단
1910년 11월 21일 2면 5단

 

1910112125단 잡보 - 일인단체와 죽산

경기도청에서 내무부훈령을 인하야 관하각군에 설립한 일인의 단체를 조사한다는 설은 기위보도어니와 죽산군에는 일인의 단체가 초무하다고 본군수 이윤영씨가 해 군청으로 수보하얏다더라.

 

19101121일자의 기사도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사를 통해 일제가 각 군에 일본인단체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죽산에는 일본인 단체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죽산은 19세기 초부터 각종 농민운동을 비롯해 동학농민혁명, 의병운동이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치열했던 곳이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죽산에 일본인 단체가 없었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읽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일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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