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시사안성
  • 승인 2018.05.0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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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숙(吳䎘), 오빈(吳䎙), 오상(吳翔), 오핵(吳翮) 4형제의 활동(1)

정무공 오정방(吳定邦)이 해주오씨 정무공파의 기초를 닦은 기반 위에 손자 4형제 오숙(吳䎘), 오빈(吳䎙), 오상(吳翔), 오핵(吳翮)은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제까지 무신 가문에서 4형제 중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무 겸전의 가문으로 진일보하기에 이르렀다.

4형제의 활동상을 살펴본다.

 

1) 문예(文藝)의 신동 천파공 오숙(吳䎘)

 

천파공 오숙 영정
천파공 오숙 영정

오숙(1592년 선조 25~ 1634년 인조 12)은 호가 천파(天坡)이며 통훈대부 종친부 전부 오사겸(吳士謙)의 장남이다.

어릴 때부터 문예의 신동으로 칭찬을 받고, 관직에 나가서는 상주문(上奏文: 임금께 올리는 글)을 잘 써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한 중국어에도 능하여 중국 사신들을 감동시켰다.

관직은 통정대부 경상도 관찰사로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그의 글재주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나타났다. 일찍이 5세에 사략(史略)을 읽기 시작하여 반 정도만 읽고 문리를 깨쳤다고 한다. 15세 때는 공의 할아버지가 방어사로 호남에 가실때 작별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두번째 호남의 많은 병력을 맡으시니,

가이없는 들판의 초목도 위명(威名)을 알리네

영웅의 사업 오늘을 기다렸으나,

손자의 석별의 정 돌아보시네

(再掌湖南萬甲兵無邊草木識威名

英雄事業須今日肯顧兒孫惜別情)

 

또 유생들이 모여 시 짓는 시험에 계속 장원을 하여 동료들 중에는 경쟁할 사람이 없었다.

차천로(車天輅1556년 명종11 ~ 1615년 광해군 7)가 고시관으로서 크게 칭찬하며 후일 큰 문장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15세 때 이호민(李好閔1553년 명종 8 ~ 1634년 인조 12)이 재상이 되기 직전 양성을 지날 때 할아버지를 따라 인사를 올리고 시와 글을 갖고 가 고쳐줄 것을 청하니 내가 고칠 것이 아니다하면서 운()을 주니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렸다.

 

들판에 깐 자리 이별 자리요,

재상의 붉은 가마 해 곁으로 돌아가네,

노래가 흰구름 흐르는 물로 멀리 들어가는데

세상 어느 곳이 쓸쓸하지 않으리오.”

(班荊野外是離筵相國

朱軒返日邊歌入白雲

流水遠世間何處不悽然)

 

공은 18세가 되는 1609(광해군 1)에 한성시에 합격하였다.

이때 고시관 이항복이 그 문장을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이어서 19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21(1612년 광해군 4)에 증광별시에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관직에 나아간 후에도 공은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22세때 중국 조정에 아뢸일이 있어, 공이 승문원 정언으로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월사이정구등재상이 모여 있는 정당(政堂)에서 한음이 집필하도록 명하고 불러주는 것을 공이 한 글자도 묻지 않고 붓이 나는 듯 기록했다. 좌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한음은 이조판서를 바라보며 이 같은 사람을 청직(淸職: 중요한 일을 맡는 직책)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공은 이튿날 시강원의 설서가 되고 곧바로 예조좌랑이 되었다.

천파공 오숙 신도비
천파공 오숙 신도비

공은 문장뿐만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 때문에 중국 사신에 여러 번 선발되었다. 28세 때 공은 병조좌랑으로 주문사(奏聞使) 서장관으로 명나라 서울에 갔다.

여기에서 공은 중국말을 잘하고 위엄 있는 용모와 말솜씨로 중국 조정의 존경을 받았다. 33세 때도 공이 주청부사를 맡아 명나라에 가 이듬해 돌아왔는데, 현지에서 중국 여러 관청에 글을 올리고 일을 간결하게 잘 처리하여 정승 휘하 모든 신하들의 칭찬을 받고 인조 임금도 뜻대로 일이 잘 처리됐다고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면서 표창하였다.

공이 42세 되던 1633(인조 11)에 황해감사가 되고, 겨울에 명나라 장수 정용이 천자의 글을 받들고 나올 때 공이 영접하였다.

이때 정용이 공의 시문을 보고 탄복하여 공의 문장은 강과 바다와 같습니다고 하고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공의 시문을 취하여 벽에 붙이고 읽으며 칭찬하였다.

이별 할 때는 몹시 서운하여 눈물을 흘렸고, 그 후 조선 사람을 만나면 그는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공이 정무를 처리함에는 언제나 분명하고 공정하였다. 공이 33(1624년 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혼란 중에 임금이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는데 급하여 종묘의 신주를 모시지 못했다. 공이 중도에 돌아가 신주를 모시고 공주까지 행차를 따라가며 잘 모셨다. 난이 수습된 후 상경하여 임금은 공을 크게 칭찬하며 승진시켜 통정대부로 올리고 병조참지에 임명했다.

공이 지방수령으로 부임했을 때는 철저하게 백성을 위하는 정사를 폈다. 29세 때(1620년 광해군 12)에 괴산군수로 나갔다. 이때 흉년이 들어 공이 백성 구제에 힘을 기울이니 관내 백성

이 모두 감읍하였고, 역적 이정원이 지방의 토호로써 방자하게 굴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피해를 입히자 공이 나서서 이를 막고 그 처와 노비 하인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정원이 이에 불만을 품고 공에게 불손하며 사납게 굴어 공은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가려 하니 관원과 백성들이 수레를 잡고 길을 막아 여러 날 동안 떠날 수 없었다.

공은 종사(宗事)에도 관심을 갖고 선대의 세계(世系)를 명확히 밝히려고 족보를 간행했다. 이때 만들어진 족보가 해주오씨 족보의 기초가 된 갑술보(1634년 인조 12)이다.

또한 군거요법(群居要法)을 만들어 3명의 동생에게 보여주고 꼭 지킬 것을 당부한 것으로 그 후 후손들에게는 가훈(家訓)과 같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공손하고 삼가라

- 조심스럽게 앉는다.

- 단정하게 손을 모은다.

- 말을 적게 한다.

2. 화목하고 온순하라

- 성냄을 참는다.

- 기운을 부드럽게 내린다.

- 어른을 공경한다.

3. 부지런하고 수고하라 -

- 독서하기

- 습자 연습

- 글짓기

* 금지사항 : 희롱하고 장난쳐 공손하고 삼가함을 깨뜨리는 행위, 오만하여 화목하고 온순함을 파괴하는 행위, 놀고 게을러 부지런하고 수고로움을 깨뜨리는 행위

* 실천방법 :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위의 세 강령과 아홉 조목을 성찰하고 저녁에도 이와 같이 한다.

* 주의사항 : 옷과 수레를 사치스럽게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나의 한결같은 생각을 움직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하면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맹서한다.

천파공 오숙 묘
천파공 오숙 묘

공이 40(1631년 인조 9)에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법을 공정히 하고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며 결재와 재판을 분명하게 신속히 처리하니 주민들이 모두 반기며 조정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또한 공은 1632(인조 10) 3월에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에게 명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를 목판본으로 중간(重刊)케 하여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구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두시언해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한시를 언해(諺解)한 책이다.

두시언해 초간본(初刊本)1443(세종 25)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등이 두시(杜詩)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성종 12)간행하였다.

그후 150여 년 뒤인 1632(인조 10)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두시언해 초간본 한질을 구하여 베끼고 교정(校正)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케 하였다.

이 중간본(重刊本)은 초간본을 단순히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교정 재해석한 것이므로 15세기의 국어를 보여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또한 초, 중간본의 언어 차이에 대한 국어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져버린 순수 고유어를 풍부하게 구사하고 있는 점과 문체에 있어 운문(韻文)의 가치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는 점 등 국어국문학 연구에 중요한 문헌(文獻)으로 간주되고 있다.

계곡 장유(谿谷張維)의 중간본 서문에 의하면 초간본을 구해 보기 힘들던 차에 경상감사 오숙이 한질을 구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하였다.

공은 1634(인조 12)에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물러나 있었다. 이때 중국 명나라의 감군(監軍: 군사 문제를 감독하는 관직)이 가도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공이 문장이 뛰어나고 중국어에도 능통하다고 하여 이곳에 접반사로 파견하였다. 공은 접반사로서 감군으로 온 중국 조정의 학사 황손무를 예법과 문장으로 탄복시켰다.

학사는 공의 말씀은 중국 조정의 말씀이오. 공의 문장은 중국 조정의 문장입니다라고 말하며 크게 감동했다.

공이 일을 성공시키고 귀경길에 송도에 이르러 풍병(風病)이 심해져 개성 유수가 조정에 알리고 궁중에서는 의원을 보내 치료하며 거듭 약을 내려보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43세로 순직(殉職)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임금은 놀라서 슬퍼하며 연도에 상여를 호위하도록 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오모(吳某)는 현명하고 각성된 재주가 많았으나 나라 일 때문에 길에서 죽었으니 내가 심히 안타깝다. 특별히 추증(追贈)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했다.

담당관서에서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의 벼슬을 내리고 부의품을 하사했으며 제관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다. 뒤에 공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고성산 남쪽에 장사지냈고 영의정 최석정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천파문집4권이 전한다.(계속)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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