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5.01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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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물유기와 방짜유기(1)
봉업사지 출토 청동발
봉업사지 출토 청동발

 

방짜란 말이 있다. 원래는 두드려서 만든 유기를 의미하지만, 예전에는 흔히 좋다는 의미에서 방짜란 말을 쓰기도 하였다. 네이버 사전에는 방짜를 충청도 방언으로아주 좋은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하여 사람이나 물건 모두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저 사람 방짜여라고 하면 사람이 좋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왜 좋은 사람이나 물건에 대하여 방짜란 말을 붙였을까? 이는 유기 제품에서 주물유기보다는 방짜 유기가 더 고급스럽고 품질이 좋은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두들겨 만들어야 하는 방짜 유기가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 어렵지만 그만큼 품질이 좋아서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후에 사람이나 물건이 좋은 것을 방짜라고 빗대어 부르게 되었다.

유기의 제작 방법은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 유기와 주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 유기’, 그리고 그 중간 형태로 주물로 성형을 한 다음 궁구름대를 이용하여 불에 달구어 두드리는 반방짜 유기가 있다. 방짜 유기와 주물 유기는 그 제작의 유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되었지만 반방짜 유기는 전남 순천 지방을 중심으로 만들며 기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은 2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주물유기장은 안성의 이수형 선생이고, 방짜유기장은 경북 문경의 이형근 선생이다. 두 분 모두 선친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는데 김수영 선생은 2008년 선친인 김근수 선생으로부터 이어받았고, 이형근 선생은 2015년 선친인 이봉주 선생에게 이어받았다.

김근수 선생님은 1916년에 때어나 2009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그는 1983년 중요문형문화재 제77호 주물유기장 보유자로 인정이 되었는데, 당시 안성에 유기 제조업을 하고 있던 곳은 김근수 선생님이 운영한 풍화유기공업사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히 안성은 주물유기의 메카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성에서도 방짜 유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 방짜 유기

방짜란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등의 비철금속을 78 : 22% 함량으로 녹인 다음 곱돌 위에다 부어 바둑이라는 큰 쇳덩이를 만들고, 그것을 11명이 한 조가 되어 계속 불에 달구어 가며 망치로 두드려 가며(메질) 형태를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작고한 무형 문화재 제77호 방짜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하면 이 방짜 제작 방식은 각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대개 남한에서는 방짜라고 하고 북한의 납청에서는 양대(良大)’라 한다 하였다.

양대란 말 그대로 좋고 큰 유기 제품을 말한다.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 및 납청 부근의 유기가 유명하여 안성 유기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납청 지방에서는 특히 대야나 징 등 큰 유기 제품을 주로 만들어서 납청 유기를 다른 말로 양대 유기라고 했다. 이에 반해 안성에서는 작고 아담한 밥그릇과 같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봉주 선생에 의하면 납청에서는 양대 공장을 놋점이라고 했고 주물 공장을 퉁점이라고 했는데 그곳에서는 예로부터 놋쇠와 퉁쇠를 확실히 구분하여 주문 및 판매를 했다고 한다.

 

. 주물 유기

주물 방식은 방짜와 마찬가지로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등 비철금속을 대략 80 : 20%의 함량으로 녹여 주물사로 만든 틀에 부어 모양을 만든다. 방짜 기법이 합금 비율을 78 : 22%의 함량을 맞추지 많으면 메질 과정에서 깨지는 데 비해 주물 기법은 합금 비율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성형 과정에서 깨진다든가 하는 문제는 별로 발생하지 않고 다만 품질에 문제를 보일 뿐이다. 구리함량이 낮아질수록 품질이 떨어지며 구리함량이 너무 높으면 구리의 연성 때문에 견고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질이 낮은 것은 구리와 아연을 50 : 50%, 심한 경우 40: 60%의 비율로 섞기도 하였다. 현재는 주물유기에도 78 : 22%의 질 좋은 재료만을 사용하고 있다. 주물 유기는 틀을 사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규격의 제품을 대량 생산하고 방짜로는 만들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 안성과 납청의 분업

1965년 김영호 선생의 안성유기산업에 관한 조사연구 보고서에는 안성의 노인들은 방짜유기로 유명한 곳은 정주 납청이었다고 하며 안성에서는 납청의 방짜유기에 눌리어 방짜유기를 만들 수 없었다고 하고 납청에서는 안성 붓배기유기에 눌리어 붓배기를 만들 수 없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지역적 분업이 행해진 것 같이 추측되었다라고 하여 그 당시 안성에서는 주물유기만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봉주 선생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납청에는 많은 유기점이 있었는데 방짜와 주물 유기점이 병존했다고 한다. 1940년대 초 일제에 의한 강제 유기 공출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방짜와 주물을 같이 만들었다가 주물은 없어지고 방짜만 남은 것이다. 작고한 중요 무형 문화재 제77호 주물유기장 김근수 옹도 안성에서는 수저 정도나 방짜로 만들었지 식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기는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적 구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원래 유기로 유명한 지역에서는 방짜와 주물을 같이 만들 수밖에 없다. 방짜는 고급품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특이한 기형의 물건은 두드려서는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기 세트를 만들려면 메나 갱을 올리는 밥그릇, 국그릇, 수저 등 방짜로 만들 수 있는 부분과 촛대 ,향로 등 방짜로 만들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주물과 방짜유기 둘 다 만들어야 세트생산이 가능하다. 또 징, 꽹과리 등 방짜만 생산이 가능하고, 주물로서는 만들 수 없는 물건도 있기 때문에 안성과 같이 유기로 유명한 지역은 반드시 방짜와 주물을 병행하여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안성에서도 유기는 방짜를 주로 생산했었고, 유명한 안성유기라 함은 방짜유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1926<동아일보> 기사에 안성유기에는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라는 것이 있고 부어서 만드는 붓백이라는 것이 있는데 외국 물품이 들어오게 된 뒤로는 유기가 많이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만들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방짜는 없어지고 붓백이만 만들게 되었으며라고 기록돼 있어, 원래는 안성에도 방짜 유기가 만들어졌으나 구한말을 기점으로 경제성이 떨어지는 방짜는 없어지고 붓백이라고 부르는 주물 유기만 남아 지금까지 전해 옴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외국 물품이란 일본산 사기와 도자기를 말한다.

안성에서는 일본산 도자기가 밀려들어 오자 경제성이 떨어지는 방짜는 없어져 주물 유기만이 남게 되고, 이로 인해 주물 유기로는 안성에 경쟁이 안 되는 납청의 경우에는 자연히 방짜만 남게 되어 안성과 납청 사이에 역할 구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광학현미경 촬영 1
광학현미경 촬영 1
광학현미경 촬영2 -  이 사진은 1997년 경기도박물관의 봉업사지 발굴조사 출토유물에 대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광학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에서 조직의 연성을 살펴보면 방짜유기와 주물유기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방짜유기는 메질을 가하기 때문에 조직이 늘어난다. 안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분묘 부장품으로 사용된 유기의 대부분은 방짜이다. 따라서 안성에서 방짜유기를 만들었음이 봉업사지 출토 청동발로도 증명이 된다.
광학현미경 촬영2 - 이 사진은 1997년 경기도박물관의 봉업사지 발굴조사 출토유물에 대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광학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에서 조직의 연성을 살펴보면 방짜유기와 주물유기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방짜유기는 메질을 가하기 때문에 조직이 늘어난다. 안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분묘 부장품으로 사용된 유기의 대부분은 방짜이다. 따라서 안성에서 방짜유기를 만들었음이 봉업사지 출토 청동발로도 증명이 된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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