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29) - 홍찬섭, 홍창수, 황명운, 황연성, 황영연(삼죽5면), 황영연(양성면), 황익수
안성의 독립운동(29) - 홍찬섭, 홍창수, 황명운, 황연성, 황영연(삼죽5면), 황영연(양성면), 황익수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31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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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30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찬섭 洪瓚燮

 

본적/주소 :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 257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이 명 : 洪昌燮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89. 2. 15~1956. 3. 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독립장(1963)

 

충남 천안 출신으로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 거주했다. 191941일 양성면· 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주동자로서 이유석·홍창섭·이덕순·최은식·이근수 등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 다. 이때 원곡면장을 끌어내 일제 기관이 있던 동항리로 행진했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와 서류 등을 파기하고, 안성과의 통화 연락을 막기 위하여 전신주를 찍어 넘어뜨렸다. 또한 양성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호적부를 소각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체포되지 않고 피신하였으나 천안군 입장면에서 체포되어 끌려가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중국 만주를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지방 선전대로 활동했다. 1921년 국내 선전의 임무를 맡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원곡·양성의 만세운동 혐의까지 가중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31

 

홍창수 洪昌洙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보동리

형량 : 현장 순국

생몰년도 : 1880~1919.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곡면에서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외가천 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 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 하자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시위 군중은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일제 경찰과 일본군이 동원되어 시위자에 대한 검거와 폭행이 자행되었고, 저항 또는 도망자에 대한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 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3·1운동 피살자명부에는 19171020일 양성경찰서 방화로 총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191941일 만세운동 때 순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련자료

3·1운동 피살자명부

 

황명운 黃明云

 

본적/주소 :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능리

형량 : 피살 순국

생몰년도 : 미상~1909. 4. 20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6)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사람이다. 19078월에 정주원이 안성에서 거의하여 의병 전쟁을 전개할 때 합류했다. 정주원 의진은 경기도 용인, 죽산, 안성 등지에서 활동 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남 당진, 서산 등지까지 진출할 정도로 의세를 떨쳤다. 특히 1908년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죽산과 양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주원 의진은 전 부대를 3개의 소부대로 나누고 선박을 이용하여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동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피체됨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정주원 의병장의 피체 이후 에도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진의 확장을 위해 힘쓰던 중 19094월 양지군 고동면 향림동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때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418

 

황연성 黃璉性

 

본적/주소 : 충청남도 공주군 신하면 백교리 416 / 안성군 양성면 석화리 75

이 명 : 黃本璉性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76. 10. 28~1943. 5. 1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1919년 당시 공주군 신하면 백교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신상면 유구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314일 유구 장날에 약 5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주동자인 황병주가 일제 경찰에 연행되자 구금자를 구출하기 위하여 경찰주재소를 습격했다. 이때 박준빈과 함께 황병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만일 석방하지 않으면 군중은 해산하지 않겠다고 항의하면서 주재소 기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증파된 일제 경찰에 의해 저지되면서 체포되었다.

19196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720일 경성복심법원과 1016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공주지방법원 1919. 6. 16 / 경성복심법원 1919. 7. 28 / 고등법원형사부 1919. 10. 16)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108, 109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1141~1144

 

황영연 黃永淵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내장리 362 /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

형량 : 피살 순국

생몰년도 : 1885. 4. 23~(1919. 4. 1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2014)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사람이다. 19194월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삼죽면)

3·1운동 피살자명부(국가기록원)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173~175

한국민족운동사료(국회도서관) 3·1운동편 제3158~159

안성3·1독립운동(안성문화원) 149

 

황영연 黃永淵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260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79~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황익수 黃翊洙

 

본적/주소 : 서울 봉래동 3-213 / 중국 상해

이 명 : 黃千萬, 黃益秀, 黃勳, 海觀

형량

생몰년도 : 1887. 7. 22~미상

계열 : 중국 방면

포상훈격 : 애국장(2011)

 

만주 등지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54월 중국 북경에서 밀정 처단과 군자금 모집 등의 목적을 위한 비밀결사인 다물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다물단의 활동은 밀정 김달하의 처단과 서동일의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 등으로 대표된다. 19254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3·1운동을 기념하여 국내와 일본 동경 에서 친일파 암살과 파괴 등을 계획했다. 이후 단원들을 비밀리에 모집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중국의 북경과 천진,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 안성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68월에는 단독으로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29년 호북성 의창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東亞日報(1926. 6. 10 / 8. 12 / 8. 13 / 10. 24 / 10. 30)

국외용의조선인명부(조선총독부) 141

상해 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3)(1920. 9. 25) 불령단관계잡건-선인의 부-재상해지(3)

31일을 기한 소요야기설에 관한 건(5)(1925. 2. 16) 불령단관계잡건-선인의 부-재상해지방(3)

북경 천진부근 재주조선인의 상황 보고서 진달의 건(1925. 3. 20) 조선인에 대한 시정관계잡건 일반의 부(3)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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