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4.30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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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8년전 판문점 주마 간산기(2)
1960년 판문점 북측 초소가 멀리 보인다. 사진 향하여 좌에서 3번째가 필자(출처/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1960년 판문점 북측 초소가 멀리 보인다. 사진 향하여 좌에서 3번째가 필자(출처/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우리 일행은 건물 밖으로 나와 한 50m 북쪽으로 가서 야외 전망대에 올랐다. (지금의 도라 전망대,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송악산 관측소(OP)가 폐쇄된 후 설치한 통일안보관광지이다.)

또 한 차례 기분이 들떠서 단체사진도 찍고 북측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단체로 교가를 한바탕 불렀으면 한데 삥 둘러싸고 있는 경비병들의 눈초리에 실행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쪽에 무슨 호텔같이 보이는 건물이 체코, 폴란드의 중립국 숙소라는데 이들이 주둔 당시에 남측에서 자유롭게 놀러 가면 상당히 대우를 잘해 주었다는 설명이다.

그 건너편에 송악산이 보인다. 그 산을 넘으면 개성이라 한다. 먼 거리에서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언제 통일이 되어서 개성인삼도 캐먹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나 하는 생각뿐이다. 바로 앞 쪽에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 이름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No return of bridge)라고 불리는 공산측이 놓은 다리다.

남쪽에서 그 다리만 넘어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돌아오는 다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다리 코앞엔 북측 경비초소가 버티고 있고 좀 떨어져서는 남측 경비초소가 지키고 있다.

우린 전망대에서 내려와서 제각기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측 육각정은 찍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으나 배경을 그 쪽에 두고 잽싸게 찍었다. 북측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들 건물만 찍어도 정식 회의를 요청해서 생떼를 쓴다고 한다. 약 한 시간 넘게 견학을 마치고 다시 판문점 입구로 되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북한을 통해서도 판문점 견학을 가끔 오기는 하는데 주로 공산권 국가 인사들이라 한다.

돌아오는 도중 남방 한계선내에 우리 측 공동취락이 있는데 당시 인구 192명이 살고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다.

국민의 의무가 전혀 없고 오직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있다. 초등학교 하나가 있는데 5학년 까지 학생은 25명뿐이다. 북쪽 지역에는 평화촌이라는 기정동 마을에 인구 10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명동성당 박희봉 지도신부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는 지금 크레물린 궁전과 바티칸 궁전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역사적 현장에 와 있다. 신을 부정하는 저쪽과 신의 존재를 믿는 우리와의 대결 현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의 힘으로 통일을 촉진시키는 길이다. 또한 한국천주교회에서 정한 러시아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겠으며 아울러 우리 자신도 회개와 보속으로 신앙생활을 더욱 튼튼히 하자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버스가 판문점을 막 벗어나려는데 누군가 밖을 보며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가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학들이 태연하게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오리들도 얌전하게 둘러앉아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2003, 11, 29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안성시 협의회 안보견학으로 당시 홍완표교수와 함께 판문점 자유의 집을 방문해 찍은 사진(필자 개인소장)
2003, 11, 29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안성시 협의회 안보견학으로 당시 홍완표교수와 함께 판문점 자유의 집을 방문해 찍은 사진(필자 개인소장)

인간들은 총부리를 마주대고 대치하고 있는데 희귀조들은 아주 평화스럽게 노닐고 있으니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DMZ 안쪽에서 지뢰 밟고 타죽은 노루들도 가끔 본다고 한다. 인간들이 휴전하는 체하는 전장에서 평화스런 동물들이 대신 산화되고 있는 현실은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오후 3시쯤 다시 임진강 철교를 지나서 서울로 향했다. 왕복으로 되어있는 이 철교는 폭격을 당한 채 그날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금은 한 쪽만 인도교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다. 간첩이 육로로 남하하는 루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 촬영은 절대 금물이다.

우리 견학단은 판문점을 뒤로 하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대학교 1학년 신분으로 어렵게 다녀온 필자로서는 당시 수필 형식으로 작성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 글을 소개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있다.

평화를 바라시는 주님, 이 나라 이 땅에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게 하소서.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웠던 저희 잘못을 깨우쳐주소서. 분단의 깊은 상처를 낫게 하시고 서로 용서하는 화해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인류의 일치를 바라시는 주님, 갈라져 사는 저희 겨레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소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평화통일을 이룩하게 하소서. 평화의 모후여 저희 한반도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사진출처 : 청와대, 공동취재단)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사진출처 : 청와대, 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두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출처 : 청와대, 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두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출처 : 청와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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