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안성관련 신문읽기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안성관련 신문읽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4.29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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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영택 양성군수, 부임을 거부하다 - 1910년 9월과 10월 안성 관련 기사
매일신보1910년9월3일2면5단 잡보 
매일신보1910년9월3일2면5단 잡보 

 

 

19109325단 잡보-양수운사(陽守云辭)

신임 양성군수 정영택(鄭永澤)씨는 하사고를 인함인지 부임치 아니한다고 대인설화 한다더라

1910년9월8일1면5단 잡보 
1910년9월8일1면5단 잡보 

 

 

19109815단 잡보: 何意不赴

관진학교 교장 정영택씨가 양성군수를 피임함은 기보어니와 소관 경찰서에서 해씨의 부임여부를 수차질문하엿다더라

 

매일신보는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조선 총독부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관제언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10년대의 경우 당시 국내에서 발행된 거의 유일한 언론으로 당시 일제의 통치정책뿐만 아니라 시대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안성 지역 근현대사 차원에서도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대한제국시절 대한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대한두글자를떼고 매일신보1910830일부터 발행되었다.

안성과 관련된 첫 기사는 그 며칠 후인 93일에 게재되고, 9월에 3, 10월에 1건의 안성과 관련된 기사를 확인 할 수 있다.

위에 안성과 관련된 첫 번째 기사와 두 번째 기사의 이미지를 소개했다.

모두 당시 양성군수로 임명된 정영택과 관련된 기사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현재 안성시를 이루는 행정구역의 원형은 1914년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은 당시 안성군을 중심으로 당시 양성군 일부와 죽산군 일부가 합해져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당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양성군과 죽산군의 경우 현재 안성으로 편입된 지역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게재하지만 지역과 관련없는 전체적인 내용도 게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영택은 대한제국이 임명한 양성군의 마지막 군수였다. 이 기사가 실리기 전 관보 등을 통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기 불과 6일전인 1910823일자로 양성군의 군수로 정식 임명된다.

그런데 여기 소개하는 기사에 의하면 그런 정영택 군수가 양성군수로 부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니고 급기야 양성군 경찰서에서 정영택에게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있다.

정영택 군수는 아마 양성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대한제국의 패망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군수로 부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이 기사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정영택 군수의 이러한 행동의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기자가 지난 2010년 자치안성신문 지면을 통해 소개한바 있다.)

정영택 군수의 행보가 궁금해 진다. 앞으로 정영택 군수와 관련된 기사가 다시 등장하는데 그 때 추가로 언급하기로 하자.

1910년 9월 29일 5면 2단 잡보 
1910년 9월 29일 5면 2단 잡보 

 

 

1910092952단 과수 신재배지

금회 원예품평회에 출품할 주요되는 신규모로 과수재배한 지에 취하야 동회의 조사에 계한 처를 견한즉 기 주요한 과수는 임금, , , , 포도, 도의 육종인대 조선전토에 과수재배할 지가 여좌하더라

경기도 안성(포도, )

1910년 10월 6일 2면 7단 잡보
1910년 10월 6일 2면 7단 잡보

 

 

191010627단 잡보- 청아범처역

청국인 왕지춘은 아편을 흡끽하다가 현행범으로 거28일에 안성군 경찰서에 피착하야 즉시 경성지방재판소로 압교하엿는대 삼작일엘 역 3년에 선고하엿다더라.

 

929일자 기사를 통해 당시 안성에서 포도와 복숭아를 재배하려고 계획한 것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육성할 계획을 세웠던 과수 품목을 알 수 있으며, 그 하나의 수단으로 원예품평회를 개최했음을 알 수 있다.

다 알다시피 안성에서는 공안국신부를 통해 포도가 도입되어 이미 포도가 재배되고 있었는데 그런 사정이 포도가 포함되는데 반영되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를 보면 품평회나 박람회 등과 관련된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존의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이른바 근대적이고 문명적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합리화하는 수단의 하나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관련된 기사를 소개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106일자 기사를 통해 당시 안성에 청국사람들이 적지 않게 거주 또는 상업상의 이유등으로 왕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들이 아편 등 마약에 손을 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마약 문제는 단골로 등장하는 기삿거리 중 하나였다. 특이한 것은 아직도 아래아”(.)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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