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와 남사당패 그리고 청룡사(마지막회)
사당패와 남사당패 그리고 청룡사(마지막회)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26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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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24(마지막회)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바뀐다는 것은 그 내부에서는 대단한 변화이다. 단지 구성원의 성별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화된 것만이 아니라, 공연의 내용이나 조직원 등에서 아주 새로운 집단로 바뀌었다. 남사당패로 변하면서 우선 인적구성원이 바뀌었는데, 여성들인 사당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남성들이 메웠다. 이에 따라 공연의 내용이 달라졌는데, 우선 사당이 사라짐으로써 남녀가 대열에 맞추어하는 판놀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사당패들은 풍물, 덧뵈기, 어름, 덜미, 살판, 버나 등 6가지 종목을 위주로 하므로 사당패 시절보다 더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한다. 이능화는 사당패에 대하여 모갑이 밑에 8~9명의 남자와 한두 명의 여자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구성원은 12명 내외가 된다. 그리고 송석하 선생은 사당거사가 부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사당과 거사의 수를 비슷하게 보더라도 약 20명 내외일 것이다.

그런데 심우성은 남사당패의 구성원이 4050명 정도라고 하였으니 사당패 시절보다 인원이 2~3배가량 증가하였는데, 이는 각 마당별로 기예자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이 여러 종목에 중복 출연을 하기도 하였지만, 주 연희자는 전문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종목에 출연할 때는 산받이 등 보조 출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남사당의 공연형태였다. 심우성 선생은 각 마당별로 연희분야의 선임자를 뜬쇠라 부르는데 이들 인원만 하여도 14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당패 시절보다는 풍물, 덧뵈기, 덜미 등 각 종목별 연희자가 훨씬 많이 필요하여 남사당패 인원이 늘어나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공연이 체기위주로 바뀌었다. 어름이나 살판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풍물도 판놀음 위주에서 체력소모가 많이 되고 인원이 많이 필요한 진법놀이를 하는 판굿으로 변하였다. 그런데 무동놀이를 보더라도 사당패에 대한 기록이나 그림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남운용 선생은 어릴 적 자신이 무동을 탈 때 5층 꼭대기에서도 양팔을 벌이고 서서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고 하였다. 5~7무동을 쌓으려면 상층에는 아주 가벼운 몸무게의 4~6세가량의 어린 아이들이 올라가야 하지만 사당패 공연에서 아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이옥이 지은 사당에 열두세 살 되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한 기록은 있지만 이 아이가 공연패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나이는 상무동을 타기에는 몸집이 너무 크다. 따라서 사당패들이 제대로 된 무동춤을 추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어, 무동춤은 남사당패로 전환되고 난 후 시작된 공연이라고 추측된다. 또 이때 필요한 상무동을 하는 어린 아이들 숫자로 인하여 전체 인원수가 따라서 늘어난 측면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 다른 대부분의 유랑예인패들은 사라지고 남사당패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남사당으로의 재편도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하였다. 곡마단과 같은 새로운 구경거리가 등장하고 일제에 의한 우리 고유의 놀이를 탄압하는 정책이 맞물려 1930년대 중반에는 전통적 의미의 남사당도 모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남사당이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남운용 선생은 소작제도의 실시가 남사당 해체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작제도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 있는 분석은 아니다.

1930년대 남사당의 해체기 무렵에도 청룡리 남사당은 기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걸립패들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하고, 주변에 새로운 남사당패 비슷한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소멸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사당패의 소멸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당패들은 공연에서 경쟁력을 높이려고 남사당패로 전환하였지만 일본의 서커스 등에 역시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경쟁에서 밀려난 남사당패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 모두 해체하고 구성원들은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아 고향으로 흩어진 후 지역 걸립패와 섞이며 활동하다가 1960민속극회남사당의 창립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바뀜으로서 사당들은 대부분 퇴출될 수밖에 없었지만 거사들도 상당수는 퇴출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고를 주로 하는 거사들이 남사당패로 바뀌면서 모두 공연에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룡리에서 퇴출된 사당과 거사들, 그 외 남사당패로 전환하지 않은 전국의 여러 사당패들은 선소리 산타령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선소리 산타령 자체가 사당패 노래이며 그 공연이 소고를 치며 여러 명이 늘어서서 가벼운 율동으로 산타령을 하는 등 사당패들 방식과 흡사한 점, 그리고 남녀가 같이 혼성으로 공연을 한다는 점에서 퇴출된 사당패와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사당패는 과연 사당패의 전통을 얼마나 이어받은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은 사당패의 후계라고는 하지만 구성원이나 공연내용면에서는 연관성이 적기 때문이다. 청룡리라는 지역과 사당패라는 명칭을 이어받아 단지 남사당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당패의 종주격인 청룡리를 차지함으로써 사당패라는 명칭을 이어 받을 수 있었고, 그 명성으로 이종의 놀이패 구성원들을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내용에서는 판이하게 달라져 사당의 판놀음 대신에 남성 연희자들이 모여 체기 위주의 6마당을 하는데, 이러한 면에서는 사당패와의 연결성을 찾기는 힘들다. 남녀가 같이 소고춤을 추고, 소리를 주로 하는 공연내용 면에서 보면 오히려 선소리 산타령패들이 사당패의 후예와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룡리 사당패의 거사들은 사당패가 해체될 때, 사당패의 종주격인 청룡리 사당패의 명성과 지역을 이어받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여성들을 퇴출시킨 후에도 거사패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남사당패라고 이름 붙인 이유일 것이다. 거사들로 구성되었으니 명칭을 거사패라고 붙여야 마땅하나 남사당패라고 한 것은 사당패라는 명칭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것임을 반증한다.

사당패의 총본산이었던 청룡리가 남사당패의 종주가 된 사실은 1920~30년대 남사당 계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름 있는 남사당 기예자는 누구나 한번 쯤 왔다가 가는 곳이 청룡리였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사당패와 남사당패들은 붙여진 이름처럼 비슷한 것 같지만 공연내용이나 구성원 면에서는 상당히 다른 놀이패이며, 다른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는 관계가 깊은 것이 두 집단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두 집단은 모두 안성 청룡사를 근거지로 삼고 이어져온 유랑예인 집단으로 우리민족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안성에서는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자 남사당풍물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 바우덕이 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홍원의(안성시 학예연구사)

 

*편집자 주 : 홍원의 학예연구사님의 "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는 이번회가 마지막회입니다. 홍원의 학예사님의 "안성민속이야기"는 약 1~2달 휴재한 후 다른 주제를 가지고 독자들을 찾아뵐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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