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24) - 정인규, 정일봉, 정주원, 정주하, 정철화, 정호근, 조경수, 조계화, 조문삼, 조병훈, 조성행
안성의 독립운동가(24) - 정인규, 정일봉, 정주원, 정주하, 정철화, 정호근, 조경수, 조계화, 조문삼, 조병훈, 조성행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26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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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25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인규 鄭寅圭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50

이 명 : 鄭仁圭, 鄭文五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90. 9. 20~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2013)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우고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3. 23, 7. 23)

每日申報(1919. 8. 10)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3111, 313~317/ 243/ 2575, 79/ 2621~24, 93, 107, 178, 185, 187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3~482

 

정일봉 鄭一鳳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463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86. 1. 14~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12)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 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3. 23)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5103~105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3~482

 

정주원 鄭周源

 

본적/주소 :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하사리

형량 :종신 유형

생몰년도 : 1870~1925. 1. 22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사람이다.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 양지, 당진 등지 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078월 원삼면 하사리에서 30여 명의 동지를 모은후 양지·양성군을 중심으로 의병 150여 명을 규합했다. 825일 안성에서 개최된 의병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이때 7개 의진 1만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후 회의에 참석한 의병장들은 각지로 흩어져 각각의 의병전쟁을 전개하였으며, 정주원 의진은 경기 남부 및 충남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9월 이후 죽산·양지 등지에서 의병장 임옥여 부대와 합진하고 의병 소모활동을 전개하여 900여 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정주원은 전 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자신은 그 중 1부대를 인솔하고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나머지 2부대는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했다. 11월 한진(漢津) 에서 배를 타고 고온포(古溫浦)에 건너가 충청도 당진·풍도·면천·서산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81월 의병 50명을 이끌고 당진주재소를 습격했다. 동년 2 월 다시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죽산군 능촌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을 치렀다. 4월 양지군 사동과 용인군 요봉골에서 교전을 치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25일 다시 당진으로 건너가 재기를 꾀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일시 부하를 해산했다. 19087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 적서촌에서 2척의 선박으로 입항할 때 신호 잘못으로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당하다가 체포되었다.

19089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동년 11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 유형에 처해졌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재판소 1908. 9. 29 / 경성공소원 1908. 11. 14)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532, 73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502, 50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54, 55, 82, 85, 101, 102, 157, 158, 387

 

정주하 鄭柱夏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이 명 : 鄭聖有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89. 5. 30~1939. 7. 1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 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방화했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정철화 鄭哲和

 

본적/주소 :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72 / 서울 서부 신문

형량 : 유형 15/ 징역 13

생몰년도 : 1882. 10. 10~1943. 10. 3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독립장(1990)

 

경기도 용인군 사람이다. 서울 새문 밖과 공평동 정영식의 집 등지에 거주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유생의 신분으로 거의에 참여했다. 의병장 허위 휘하의 관서창의군 방인관 부대에 들어가 비서로서 의병 14 명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또 안성군 죽산면 칠장 사에서 30여 명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안성·충주·청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반격에 밀려 서울 외곽에서 은거하던중 1907930일 체포되었다.

1908529일 평리원에서 내란죄로 유형 15년에 처해졌다. 19139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의 일원으로 일제 내각총리대신·조선총독 등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19144월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19155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

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7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지내다가 1941년 귀국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평리원 1908. 5. 29 / 경성지방법원 1915. 3. 4 / 경성지방법원 1915. 5. 12 / 경성복심법원 1915.

7. 23)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77

무장독립운동비사 9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0, 68

한국독립사(금승학) 하권 260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158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41, 60, 61

 

정호근 鄭鎬根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6

이 명 : 鄭來順, 鄭求順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89. 2. 25~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 3개를 도끼를 찍어 쓰러뜨렸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 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 1921. 1. 23)

東亞日報(1920. 7. 23)

 

조경수 趙慶洙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262

이 명 : 趙義德

형량 : 순국

생몰년도: 1885. 4. 1~1919. 4. 3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안성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심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조계화 曺癸和

독립운동가 조계화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조계화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건지리 468

이 명 : 曺山茂永, 曺山茂雄

형량 : 징역 1

생몰년도 : 1907. 5. 27~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사람이다. 19443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322 일 만기 출소했다.

 

관련자료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조문삼 曺文三

독립운동가 조문삼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조문삼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매산리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88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건국포장(2014)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안성군 이죽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밤 마을 주민들을 권유하여 죽산리로 가서 약 2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19196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7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228일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9 / 경성복심법원 1919. 7. 31)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5419

 

조병훈 趙炳薰

 

조병훈
조병훈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산정리 208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99. 11. 2~1969. 3. 16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양성우편소,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2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 176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조성행 趙聖行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산북리 34

형량 :

생몰년도 : 1893~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밤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안성군 일죽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와 주천리주재소에 투석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7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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