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친절한 일본 (2)
의외로 친절한 일본 (2)
  • 시사안성
  • 승인 2019.03.2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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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31

세계에서 안성이라는 이름이 같은 도시가 외국에 있다니 얼마나 반가웠던 일인가?

1979414일 안성JC 방문단이 大阪발 일본 특급 초고속 열차를 타고 京都를 지나 1시간 만에 名古屋에 도착한 후 다시 갈아탄 기차로 30분후에 도착한 곳이 일본 安城시였다.

15일 일본 동해바다 요트놀이 항해 일정과 岡崎시에서 있었던 공식 환영 만찬회와 온천, 그리고 게이샤문화를 탐방(?)하고 나서 16일 다시 일본 安城시를 공식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중부지방 동해에 인접해 있는 愛知安城(ANJO)시는 당시 인구 111000명의 전원도시이며 일본 제일의 시범 농업 도시로 알려진 일본 굴지의 농업협동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일본 安城시청 방문/ 岩月시장 및 관계 공무원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있다(탁자 오른쪽 가운데에 앉아있는 모습이 필자이다)
일본 安城시청 방문/ 岩月시장 및 관계 공무원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있다(탁자 오른쪽 가운데에 앉아있는 모습이 필자이다)

 

1. 일본 安城청년회의소(JC)와의 인연

1969년부터 일본 安城시 안성농협은 지명이 같은 한국의 안성 농업협동조합과 자매결연 관계가 맺어 있었다.

같은 국제단체인 한일 양국의 安城JC 끼리도 1975년부터 우정을 교류하고 있던 차에, 그 후 일본 회원들이 세 차례에 걸쳐서 한국 안성JC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9794월 필자를 포함한 안성JC 대표단 4명이 처음으로 일본 安城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75년 안성JC 5대회장으로 선출된 필자는 4월초에 안성군청(이건우 군수) 정 모 과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우리 군의 안성 농협이 일본 안성 농협과 자매관계에 있는데, 일본에서 청년회의소 회원 한분이 우리 군청을 방문하여 안성청년회의소 관계자를 찾고 있으니 군청으로 와 줄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회장으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에서 책임감도 있고 해서 안성JC 현황을 메모하여 가지고 군청을 방문하여, 일본에서 온 JC회원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일본 ()杉浦시계점 대표로 있는 杉浦 保라는 명함을 건네주면서 일본 安城(Anjo)JC 역대회장을 지낸바 있다면서 자기소개를 하였다. 마침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서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杉浦 씨는 이곳 안성 농협과 자매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 안성 농협 관계자로부터 이곳에 안성청년회의소(JC)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 시간이 되면 일본 안성청년회의소를 방문해도 좋겠다는 말도 하였다.

이러한 방문이 있었던 이듬해인 197654일엔 일본 安城JC에서 東松山JC 소속 회원들과 함께 15명이 안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 안성JC에서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예식장을 빌려 간단한 환영식을 갖기도 하였다.

방문한 일본 JC회원들과 우호 교류를 마친 다음에는 안성JC 회원들과 함께 비봉산에 올라가 기념식수로 소나무를 심는 행사도 가졌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1년 쯤 지난 어느 날, 그 소나무는 군청에서 직원들을 시켜 뽑아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유인 즉 그 소나무는 우리나라 소나무가 아니라 일본 소나무인 적송(赤松)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나무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신인데 그들이 일본에서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본 소나무를 안성의 자존심인 비봉산에 심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문제는 양국의 JC우정보다도 한. 일간의 국민감정에 관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몇 년 전 언제인가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비봉산 정상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아버렸다는 기사가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그 후 1977811일에도 역시 일본 安城東松山에서 JC회원 21명이 안성을 방문하게 되어 환영식을 가진바 있었다. 일본 안성JC 회원들이 안성을 방문하였을 때, 같은 일본의 동송산JC 회원들이 같이 오게 된 동기는 잘 모르겠다.

지리적으로 일본 安城愛知현에 있고 東松山은 동경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埼玉현에 소재하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안성을 알고 있는 일본 안성JC에서 소개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78317일에도 일본 안성 JC회원들이 또 한 차례 이곳 안성에 와서 시청을 비롯하여 농협 등 몇몇 기관을 방문하고 양 JC간의 우호를 다짐하는 등 안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현재 안성JC는 이름이 같은 일본 安城JC와는 자매결연 관계에 있지 못하고 일본 東松山JC와 결연을 맺어 오다가 19901024일부터는 일본 比企JC와 우호JC 관계를 맺어 회원들이 몇 차례 일본을 다녀오는 등 상호 방문과 함께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안성JC 역사상 처음으로 결성된 자매결연 대표단으로 일본 安城JC를 방문한 적이 있는 필자 일행으로서는 다소 서운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일본 安城시장 방문 시 기자회견

방문소식이 게재된 일본 中日신문/ 한국 안성JC 대표단과 교류를 나누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기사에도 岩月시장에게 명함을 건네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나와 있다)
방문소식이 게재된 일본 中日신문/ 한국 안성JC 대표단과 교류를 나누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기사에도 岩月시장에게 명함을 건네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나와 있다)

1979416일 아침, 한국의 일본 방문단 일행은 일본 안성JC 회원들의 안내를 받아 安城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본 안성시청의 岩月시장과 시청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자리에서 우리 안성군수(이호선)의 메시지도 전달하였다.

세계에서 이름이 같은 우리 안성농협이 일본 安城농협과 그리고 양국 安城JC 끼리도 교류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 안성군과 일본 안성시와도 교류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우리 청년들이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민간외교의 장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岩月시장의 시정 현황을 설명 듣고 이어진 간담회를 마치고 나니, 일본 신문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민단 간부 李源圭씨의 통역으로 일본에서 제일가는 朝日신문과 讀賣신문, 中日신문 기자 4명과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본 安城과 이름이 같은 한국 안성에서 왔다는 점을 크게 부각 시키려는지 양 JC간의 교류 내용, 일본 방문 소감, 일본에서의 주요 일정 등에 대하여 주로 물었다.

일본 朝日新聞 기사/ 한국 안성JC 대표단이 일본 안성JC 회원들과 함께 일본 안성시청을 방문하여 교류를 나누었다는 소식이 게재된 신문이다
일본 朝日新聞 기사/ 한국 안성JC 대표단이 일본 안성JC 회원들과 함께 일본 안성시청을 방문하여 교류를 나누었다는 소식이 게재된 신문이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417일자 조간인 朝日신문과 中日신문에 우리들 사진과 함께 123단 톱기사로 실려 있었다. 필자는 호텔에서 그 신문을 구입하여 신주단지 모시듯 가지고 왔다(사진).

讀賣신문은 당시 한국에서 강제 출국된 연유인지, 취재는 해 갔으나 신문 보도는 되지 않았다. 개인 자격으로 일본 여행을 했더라면 인터뷰는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청년 단체에 대한 일본 국내에서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필자도 국제청년회의소(JCI)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람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3. 일본 시범농협인 愛知安城농협

일본 安城 농협 방문/ 安城농협을 방문하였을 때 농협 현관에서 마중 나온 농협장, 일본 안성JC 회원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다(가운데 서있는 분이 일본 농협장이고 왼쪽에서 첫 번째가 필자이다)
일본 安城 농협 방문/ 安城농협을 방문하였을 때 농협 현관에서 마중 나온 농협장, 일본 안성JC 회원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다(가운데 서있는 분이 일본 농협장이고 왼쪽에서 첫 번째가 필자이다)

416일 오후에 방문한 일본 안성농협은 농업 분야뿐만 아니라 자동차 공업(특히 정비 및 검사) 분야까지 다루는 다목적 농협이었다. 1978년도 농산물 취급고 390억 엔으로 전국 1위이고 농협은행 예금 잔고는 365억 엔을 자랑하는 명실 공히 일본 제일의 시범 농협이었다.

차지하고 있는 건물의 면적도 일본의 여느 농협을 훨씬 뛰어 넘고 있다는 것이며 모든 시스템이 기계화, 자동화되어 있었다. 도정시설도 우수하여 시민들이 언제 어느 때든 햅쌀과 같은 양질의 쌀을 밥솥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밥솥 이야기가 나왔지만, 우리는 80년대 초 일본제 전기밥통 파문을 겪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는 많은 부인들이 공항에 들어오면서 일제 전기밥통 하나씩 들고 멋쩍어하는 모습의 사진이 찍혔고, 아울러 신문 기사를 통하여 국민의 호된 비판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매스컴의 질책은 부인들이 우리나라에도 흔해 빠진, 밥솥 하나씩을 사서 안고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논조이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만든 전기밥솥이 최고이지만, 필자는 당시 언론이 밥솥을 들고 들어오는 주부들을 밥통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주부들을 밥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생명권 확보의 기본 도구인 전자 밥솥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당시의 가전 제품회사를 밥통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현대식 安城市 農協 쌀 가공공장/ 일본 시범 농협인 안성시 농협을 방문하였을 때 현대식으로 건축된 일본 쌀 가공공장의 건물 모습이다
현대식 安城市 農協 쌀 가공공장/ 일본 시범 농협인 안성시 농협을 방문하였을 때 현대식으로 건축된 일본 쌀 가공공장의 건물 모습이다

일본 농협을 관찰하고 나서 또 한 가지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농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권을 확보해 주기 위해 힘들게 농사지어 낸 쌀값 문제이다.

신문 보도를 통해서 생각해 볼 때, 요즘 공기 밥 한 그릇에 담는 쌀값이 100원짜리 동전 두 닢 가치도 못 된다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이다. 오히려 이를 외면하는 당국의 농업정책을 가리켜 밥통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일본 농협의 특징은,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주고 농가에서 생산한 벼를 농협에서 보관해주고, 필요시 도정해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점이다. 또한, 농민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 농기구 센터를 농민 입장에서 직접 운영해줌으로써 농가를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일본 농협의 농산물 판매사업은 농가가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 농협이 수집하고 일본 전농(全農)을 통하여 도매시장에 출하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하여 도매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영세 소농은 농산물 판매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게 해주는 점이 우수성이라고 생각되었다.

 

4. 安城시립 西部小學校 방문

일본 安城시립 西部小學校 방문/ ‘서부소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도자기 제작 미술 수업을 참관하고 나서 교장실에 들렀을 때 교사인 필자에게 두꺼비 모형의 청자를 기념품으로 주고 있는 모습이다
일본 安城시립 西部小學校 방문/ ‘서부소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도자기 제작 미술 수업을 참관하고 나서 교장실에 들렀을 때 교사인 필자에게 두꺼비 모형의 청자를 기념품으로 주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일행이 일본 안성 시립(市立) 초등학교인 서부소학교를 방문하여 보니, 당시 학생 937명의 4학급 6년제로서 교사 32명 중 여교사가 절반인 17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소한 옷차림의 교장선생님의 인자한 미소와 친절, 어린이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에서 교육자의 품격 그 자체를 보는 듯 했으며 교사인 필자를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었던 과거 신사(神祠) 참배하던 장소는 학생들의 체험 학습장인 암석원(巖石園)으로 개조되었다는 설명이다.

우리 일행은 학교 시설을 여기 저기 관찰하게 되었다. 우선 교실 복도에 들어서니 물비누가 달린 수도시설이 있어서 어린 학생들이 손도 씻고 또 청소하기에 편리하게 되어있었다.

교실마다 TV와 실물 환등기도 설치되어 있는 시청각 시설도 좋아보였다. 눈여겨보고 있는 필자는 교사로서 70년대 한국 초등학교의 콩나물 교실과 비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교장선생님 안내로 공부하는 교실에 들어가 참관하던 중 휴대용 필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자계산기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산수 시험시간에도 계산기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지금부터 40년 전의 이야기이다.

일본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전자계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시험문제 출제 방침까지 미리 세워 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본 초등교육의 우수사례라고 평가하고 싶다.

안전모 쓴 일본 자전거 통학생/ 시가지에 나왔을 때 일본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복 차림에 헬멧을 쓰고 하교 하려는 자전거 통학생 모습이다
안전모 쓴 일본 자전거 통학생/ 시가지에 나왔을 때 일본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복 차림에 헬멧을 쓰고 하교 하려는 자전거 통학생 모습이다

이에 비하여 한국의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시험 볼 때 계산기를 사용했다가는 즉시 부정행위로 적발되어 버린다.

영점 처리되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 도중이라도 증거로 삼는다면서 학생 시험지를 뺏어 교무실로 가지고 가서 징계까지 논하게 되어 있는 실정이 아닌가?

야외 미술 수업 현장에 가보니 초등학생들인데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도자기를 빚어서 청자 색 띄는 유약을 발라 가마에 넣어 구어 내는 제작 과정을 보고 두 번째로 놀라웠다.

작은 학교인데도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가마시설이 초등학교에 완비되어 있는 점에서 교육시설과 교수학습방법이 우수하다는 점을 또 한 번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복도에 우산이 많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의 기후 상태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또한 자전거 통학생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 거치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하교 시에는 교내 운동장에 마치 운전면허 시험장처럼 설치되어 있는 자전거 교통표시판에 따라 통행하고, 머리에는 반드시 안전을 위해 헬멧을 착용하는 기본 생활 수칙이 정해져 있는 듯이 보였다.

당시 학교를 방문했던 그날, 비가 오려는지 날씨는 잔뜩 흐려져 있었는데 귀가하는 어린 학생들의 얼굴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5. 귀국 길-따뜻한 청년 대한민국

김포 공항에 마중 나온 가족/ 안성JC 외국방문단이 되어 생전 처음으로 10박 11일 동안 대만, 홍콩, 일본을 방문하여 공식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 꽃다발을 들고 마중 나온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김포 공항에 마중 나온 가족/ 안성JC 외국방문단이 되어 생전 처음으로 10박 11일 동안 대만, 홍콩, 일본을 방문하여 공식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 꽃다발을 들고 마중 나온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417일 오후 350분 서울 행 KAL기가 일본 상공에서 고도를 잡으니 필자는 몸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게 되었다. 또 다시 기도를 하기 위해 묵주를 손에 쥐었다.

이번 일정을 통하여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대만)은 같은 동양 문화권에서 비교적 가까이 존재하고 있으나 그 환경과 운명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중국 본토에서 총통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해 온 세대는 당시 70고령을 모두 넘기고 있었다. 청년들은 정치참여도가 약간 낮은 듯 청년활동을 통하여 기분을 전환시키고 있으며 반공 新中國 건설을 향한 국민적 단결은 自强 바로 그것이었다.

입헌 군주국인 日本의 주력 세대는 60대 이상으로 경제 강국을 세우기 위한 노력이 대단하며, 청년층은 행동주의적 비판활동으로 압력단체(Presure Group)를 구성하여 기성세대에 도전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고민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에 비하여 당시 한국은 40~50대가 중심세대이며 이는 일본보다는 10, 중화민국(대만)보다는 20년이나 젊은 청년층에서 국제조류의 파도를 헤쳐 가며 선진 민주 한국에로의 도약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느 국가이고 그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국력이 필요하다. 중국은 국방력 위주요 일본은 경제력 위주인데 한국은 정신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안보 현실에 놓여있다. 항상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국토가 좁아서 고민하는 대만은 대륙의 바닷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기후가 나쁘고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일본은 갈라진 땅을 독도(獨島)로 때우려는 식의 오만방자 그 자체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한민족, 아니 고구려까지 국토를 넓혀 나가려는 듯 삼천리금수강산은 물 좋고 산 좋으며 인심 좋기로 유명하다. 젊은 백두와 한라의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고 진지하다.

활력 있는 한반도는 앞으로 10년 내에 통일 강국으로 용솟음 칠 것이 확실하다.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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