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23) - 장경춘, 장덕관, 장순석, 장원심, 전봉규, 전수만, 정문규, 정봉안, 정영실, 정용재, 정은경
안성의 독립운동가(23) - 장경춘, 장덕관, 장순석, 장원심, 전봉규, 전수만, 정문규, 정봉안, 정영실, 정용재, 정은경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25 06: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24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경춘 張景春

 

본적/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52 / 충청북도 괴산군

이 명 : 張昌植, 張元植

형량 : 종신 유형

생몰년도 : 1880. 10. 8~1923. 5. 9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0)

 

충북 음성 사람이다. 제천의 정운경 의진에 가담하여 박달재 전투와 단양전투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끄는 강한조 의병진에 가담하여 십장( 什長) 으로 임명되었다. 1907913일 죽산 백암시장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 중 이천 출신 의병이 일본순사 1명을 사살하자 그 순사가 가지고 있던 5연발총을 차지해 의병 70여 명과 함께 이천·진천·음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동년 925일 이교철과 민가에 투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071228일 경기재판소에서 종신 유형을 받았다. 1908121일 평리 원에서 15년 유형으로 감형되고 서도(西島)에 유배되어 28개월 뒤 19108월에 해금되었다.

이후 만주 관전현으로 망명하여 유인석 휘하에서 1916년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가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별집 1341, 343

 

장덕관 張德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15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87. 4. 7~1938. 12. 16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장순석 張順錫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115

형량 : 태형 90

생몰년도 : 1872~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08)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안성군 양성면에서 오세경·오 관영의 주도로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산에서 만세를 부른 후 양성면으로 가서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어 양성보통학교 앞에 가서 독립만 세시위를 전개하고 원곡면의 주민들과 합류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되었다.

1919519일 안성경찰서에서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정부는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경기도사편찬위원회) 333~335, 350

 

장원심 張元心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16

이 명 : 張元正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89. 11. 29~1939. 3. 1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2)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전봉규 全奉奎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생몰년도 : 미상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5)

 

19077월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병한 후 의병장이 되어 경기 남부지방에서 활약 했다. 민병찬 의병장과 함께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죽산과 안성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121

 

전수만 全守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709

이 명 : 全起先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83. 11. 28~1942. 8. 15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정문규 鄭文圭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현매리 297 /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 470

이 명 : 智山文圭

형량 : 징역 4

생몰년도 : 1915. 8. 11~1970. 12. 18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애족장(2007)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이다.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망명을 권유했다.

19433월 중국 산해관까지 갔다가 일제의 단속으로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19447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 암살용 독약과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457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영업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4(미결구류일수 70일 본형 산입) 을 받아 옥고를 치루다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45. 7. 23)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정봉안 鄭鳳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903. 8. 1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 3개를 도끼를 찍어 쓰러뜨렸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 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 1921. 1. 23)

東亞日報(1920. 7. 23)

 

정영실 鄭榮實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형량 : 현장 순국

생몰년도 : 1895~1919.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곡면에서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외가천 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 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 하자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시위 군중은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일제 경찰과 일본군이 동원되어 시위자에 대한 검거와 폭행이 자행되었고, 저항 또는 도망자에 대한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 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3·1운동 피살자명부에는 원곡면 죽백리에서 19208월 타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191941일 만세운동 때 순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련자료

3·1운동 피살자명부

 

정용재 鄭容在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형량 : 옥중 순국

생몰년도 : 190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2011)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 다.

19191020일 고등법원에서 예심을 받고 수감되어 있던 중 1심 재판이 열리기 전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3. 23)

朝鮮日報(1920. 12. 23)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3~438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5167~170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0~172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4509~510, 5133~138

 

정은경 鄭殷景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구장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90~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 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