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22) - 이홍기, 이홍렬, 이화영, 이흥길, 이흥준, 이희룡, 임근수, 임성운, 임옥여, 임일봉, 임허옥
안성의 독립운동가(22) - 이홍기, 이홍렬, 이화영, 이흥길, 이흥준, 이희룡, 임근수, 임성운, 임옥여, 임일봉, 임허옥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23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23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홍기 李洪基

 

이홍기
이홍기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618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902. 9. 5~1957. 3. 2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홍렬 李洪烈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444

이 명 : 李敬寬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95. 10. 15~1922. 11. 2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화영 李華榮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04

이 명 : 李敬伯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80. 8. 12~1961. 12. 1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흥길 李興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228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899. 8. 21~1929. 11. 29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 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짚으로 불을 질러 건물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통신을 두절시키기 위해 도끼로 전신주를 찍어 넘어뜨리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흥준 李興俊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90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 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이희룡 李熙龍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99

이 명 : 李時殷

형량 : 징역 12

생몰년도 : 1874. 5. 22~1948. 12. 2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독립장(1990)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납리 출신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의병에 가담해 여주·원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주동자로서 이유석·홍창섭·이덕순·최은식·이 근수 등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 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어 양성면에서 2천여 군중들과 함께 일제 통치기구 파괴에 앞장섰다. 다음에는 원곡면에서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1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 경성복심법원 1927. 2. 24)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3. 23; 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 176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임근수 林根洙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리 271

형량 : 총살 순국

생몰년도 : 1859. 6. 5~1907. 7. 24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사람이다. 강태영, 김명기, 임진오 등과 함께 안성에서 수천명의 군민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 안성지회를 공격하는 한편 격문을 사방에 보냈다. 이에 죽산, 양지, 수원 등지에서 청년들이 모여 경기 남부지역의 의병 봉기로 이어졌다. 안성에서 거의한 200여 명의 의병은 일본군과 2차례 교전하고, 파출소와 일본인을 습격했다. 그리고 광무황제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택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첩보를 접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친일 전향을 권고 회유하였 으나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07년 음력 724일 수원 서문 밖에서 총살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皇城新聞(1907. 8. 2)

大韓每日申報(1907. 8. 3)

황성신문(1907. 8. 20)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7

3·1운동 피살자명부

 

임성운 任成云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202

이 명 : 任雲善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70. 8. 27~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06)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豫審終結決定書(1920. 3.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7~432, 439~482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3

 

임옥여 任玉汝

 

본적/주소 :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평창리

이 명 : 任景宰

형량 : 총살 순국

생몰년도 : 1871. 4. 29~1907. 11. 10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19078월 이천창의소의 좌장이 되어 21일과 30일에 이천주재 일본군 기병과 교전을 벌였으며, 포군 12명을 이끌고 광주군 실촌면에서 포군 70여 명을 모집한 뒤 용인 굴암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동년 914일 포군 18 명을 이끌고 양근·안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포군 36명을 인솔하여 죽산군 원일면으로 가서 고초곡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1월에 광주군 상림의 길가에서 일진회원 4, 백암 장터에서 1명 등을 총살하였고,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와 순검 각 1명을 총살했다. 1110일 자택에서 일본군수비대의 습격으로 총살을 당해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504, 50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31, 123

 

임일봉 林一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 286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892. 10. 10~1922. 1. 2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건국포장(2015)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19331일부터 41일에 걸쳐 안성군 읍내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동년 331일 밤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다음날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장기리, 동리, 서리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19195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아 공소하 였으나 동년 7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13 / 경성복심법원 1921. 7. 24)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형사공소사건부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11~413

 

임허옥 任許玉

 

본적/주소 : 경기도 용인군

형량 : 유형 10

생몰년도 : 1879~미상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5)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19078월 윤관문(尹官文)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 안성 일대에서 활약했다.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지 6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요봉동을 거쳐 곽이동과 업이동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고, 안성군에서는 일본군과 교전했다. 동년 9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9084월 다시 의진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08721일 경기재판소에서 유형 10년에 처해졌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기재판소 1908. 7. 21)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42, 4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