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18) - 이성렬, 이성률, 이성옥, 이성윤, 이수봉, 이수혁, 이순기, 이승익, 이양섭, 이영근, 이영우
안성의 독립운동가(18) - 이성렬, 이성률, 이성옥, 이성윤, 이수봉, 이수혁, 이순기, 이승익, 이양섭, 이영근, 이영우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19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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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19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성렬 李成烈

이성렬
이성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이 명 : 李光國, 李石烈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91. 5. 3~1949. 9. 6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성률 李聖律

 

이성률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03

이 명 : 李裕燦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94. 1. 6~1979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2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성옥 李成玉

독립운동가 이성옥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이성옥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

형량 : 징역 16

생몰년도 : 1887~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19330일 밤 안성군 읍내면 서리에서 마을 사람 수백 명을 모아 선두에 서서 행진하였고, 안성경찰서, 안성군청 등지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331일 오후 3시경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여 수백 명이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41일에 일본군 수비병이 도착하여 만세시위를 하는 사람이 없자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5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공소하여 동년 75일 징역 16월형으로 감형되어 다시 상고하였으나 96일 고등법 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23 / 경성복심법원 1919. 7. 5 / 고등법원형사부 1919. 9. 6)

 

이성윤 李成允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구장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90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이수봉 李壽奉

 

이수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주천리 466

이 명 : 朴漢洪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897. 7. 3~1946. 11. 1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00)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일죽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42일 저녁 오순경, 조성행, 유영창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 되자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일죽면사무소까지 만세시위 행진을 했다. 이어 주천리(注川里)의 주재소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6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형을 받아 공소하 였으나 동년 625일 경성복심법원과 81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10 / 경성복심법원 1919. 6. 25 / 고등법원형사부 1919. 8. 14)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

 

이수혁 李壽赫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형량 : 징역 6

생몰년도 : 1897~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밤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고, 마을 사람 100여 명과 함께 이죽면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 소, 보통학교 등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6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6)

 

이순기 李舜基

 

이순기
이순기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494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97. 9. 26~1959. 12. 25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승익 李承益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80

이 명 : 李公三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86. 10. 3~1942. 4. 1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1919328일 이근수(李根洙) 등과 독립만세시위에 벌였으며, 동년 41일에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 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 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양섭 李陽燮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64

이 명 : 李明汝

형량 : 징역 10/옥중 순국

생몰년도 : 1894. 2. 8~1925. 5. 19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독립장(1968)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 만세 시위 후 성은고개를 지나 양성면에서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는 양성주재소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 때 주재소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짚을 가져다가 홍근배( 洪根培) 와 함께 건물과 기물을 방화했다. 그리고 양성우편소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 등을 파괴했다. 이어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 및 기물을 파괴하고 전신선을 절단, 일본 경찰을 결박 구타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심하게 구타당하여 들것에 실려안성경찰서로 이송되기도 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았다. 경성형무소에서 7년째 복역 하던 중 형무소 내에서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3·1운동비사(이병헌) 879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6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영근 李英根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형량 : 징역 6

생몰년도 : 1896~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밤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고, 마을 사람 100여 명과 함께 이죽면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6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6)

 

이영우 李英雨

 

이영우
이영우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4 / 죽백리 86

이 명 : 李建和

형량 : 징역 13

생몰년도 : 1901. 12. 21~1979. 7. 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3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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