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16) - 이금철, 이기훈, 이대근, 이덕순, 이명하, 이발영, 이병구, 이병렬, 이병문, 이병억, 이병오
안성의 독립운동가(16) - 이금철, 이기훈, 이대근, 이덕순, 이명하, 이발영, 이병구, 이병렬, 이병문, 이병억, 이병오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17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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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17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금철 李今哲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이 명 : 李今甫

형량 : 징역 5

생몰년도 : 1879. 11. 2~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2009)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 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 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우편소 전화 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3개를 잘라 넘어뜨렸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3. 23)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4509~510/ 5133~138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3/ 24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기훈 李起薰

독립운동가 이기훈의 일제감시대상인물 카드
독립운동가 이기훈의 일제감시대상인물 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두현리 219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867. 8. 30~1947. 5.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03)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1~2일 이죽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윤상구(尹商求) ·이응식(李應植) 등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 되고 있음을 전해 듣고,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191941일 마을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이죽면사무소와 죽산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 죽산리시장과 죽산주재소에서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6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718일 경성복심법원과 89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04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6 / 경성복심법원 1919. 7. 18 / 고등법원형사부 1919. 8. 9)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16~417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별집 5624

 

이대근 李大根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823

이 명 : 李鐘文

형량 : 징역 13

생몰년도 : 1871. 9. 25~1950. 9. 1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3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덕순 李德順

 

이덕순
이덕순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지제리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18

형량 :

생몰년도 : 1879. 4. 15~1966. 12. 30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진위군 출신으로 안성군 원곡면에 거주했다. 191941~2일에 걸친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의 독립만세시위 주동자로서 이유석·홍창섭·최은식·이근수 등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원곡면장을 끌어내 일제 기관이 있던 동항리로 행진했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와 서류 등을 파기하고, 안성과의 통화 연락을 막기 위하여 전신주를 찍어 넘어뜨렸다. 또한 양성면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호적부를 소각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명하 李明夏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 중국 봉천 서탑대가 3정목

형량 : 징역 5

생몰년도 : 1886~미상

계열 : 임시정부

포상훈격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시위대 제2대대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장야(長野) , 동경(東京) 등지의 모직물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20년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하고 만주로 도항했다. 길림, 하얼빈, 봉천 등을 전전하다가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과거 무관학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192011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찾아갔지만 간발의 차로 만나지 못하고 대신 노백린 휘하의 김성관을 통해 대한민국 군정서에 들어갔다. 군사적 지식은 물론 폭탄제조 기술까지 갖추고 있어 대한군정서 참모부 소위가 되었다. 그리고 김학원(李學元, 이명 이열무, 대한민국군정서 참모부 중위, 27)과 함께 국내작전 지시를 받고, 1921129일 봉천을 거쳐 평양에 잠입했다. 평양 대동군 일대에서 자동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대한군정서 명의의 명령서를 지참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수색 중이던 중화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 의용단 원과 교전을 벌였으나 214일 체포되었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육군성대일기

 

이발영 李發榮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445

이 명 : 李聖武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80. 7. 24~1949. 4. 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병구 李丙求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16

이 명 : 李致大, 李師大, 이병국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91. 9. 16~1950. 7. 30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 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병렬 李炳烈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이 명 : 李敬全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86. 1. 13~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 3개를 도끼를 찍어 쓰러뜨렸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 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이병진(1-92;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어 추후 조사가 필요함.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이병문 李丙文

 

이병문
이병문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521

이 명 : 李聖道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88. 8. 20~1921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병억 李秉億

 

본적/주소 :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

형량 : 징역 6

생몰년도 : 1856~1921. 7. 7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03)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14년 음력 5~6월 경 의병장 출신 김재성을 만나 의거를 계획했다. 동년 음력 7월 그믐 경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안성군 안성읍내의 민병승에게 군자금 출연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후 충북 충주군 서촌에 있는 이상현을 찾아가 군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음력 75일에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선유동 박동식에게 군자금 25원을 모집했다. 경기 안성 및 충북 충주·괴산 등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191531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

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1915. 3. 11)

 

이병오 李丙五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455

이 명 : 李聖弼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77. 5. 23~1948. 7.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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