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로의 전환배경Ⅲ
남사당패로의 전환배경Ⅲ
  • 시사안성
  • 승인 2019.03.1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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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23

1920~30년대 일본 곡마단의 공연을 구경한 청룡리 남사당패 남운용 선생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우리가 평양에 갔다가 우연히 우라다곡마단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천으로 높다랗게 포장을 친 것이라든지 악대(樂隊)가 나팔을 불어대고 북을 치는 것이라든지 형세가 우리하고는 딴판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재주도 공중그네, 철봉, 말타기 등등 다채로웠고 짐승은 말뿐 아니라 개와 원숭이도 있었고 당시로서는 희한한 오토바이도 나왔다. 제법 사람들의 혼을 빼는 재주를 부린다고 자부하던 우리들은 곡마단의 신기한 재주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렇듯 당시 일본인의 공연은 일반인들에게만 눈길을 끈 정도가 아니라 전문 예인집단인 남사당패마저 넋을 잃게 할 정도의 새로운 광경이었던 것이다. 남운용 선생의 이러한 술회는 물론 시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한 세대 이전의 사당패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공연단의 새로운 공연은 개화기 조선의 모든 전문 예인패에 위기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한편 중국인의 공연 역시 일찍이 조선에 침투하여 1899년에는 청나라 공연단이 전라북도에 까지 공연을 다녔으며, 어리석은 우리나라 사람의 돈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이들은 창시(唱戱), 원숭이 공연 그리고 요술을 주로 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이 세상에 없는 기이한 구경으로 알고 돈을 많이 주고 관람하였으며, 이에 기세등등한 청나라 공연단은 심지어 이를 단속하는 하급관리를 구타하는 일마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들이 잡술로 조선인의 눈을 현혹케 하고 돈을 빼앗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상당히 퍼져 있었고, 이들은 조선의 예인들을 위협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외부의 경쟁자를 만난 사당패들은 기존의 공연행태를 버리고 새로운 형식의 볼거리를 만드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패들은 외국의 공연단에 대항하여, 그들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연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다양한 기예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체기위주로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남사당패에서 일본 공연단들의 요소를 일부 받아들이기도 한 점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남사당 덧뵈기 공연
남사당 덧뵈기 공연

 

셋째, 유성기의 보급이다. 우리나라에 유성기가 들어온 것은 1899년 이전이다. 18993황성신문에는 서양에서 발명한 유성기를 사서 당시 봉상시 앞에 놓았으니 구경 오라는 광고가 실렸으며, 18994독립신문에는 유성기에 명창광대, 기생 등의 노래를 넣고 움직이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당패들의 주 공연 종목은 선소리인데 유성기의 등장은 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종목의 예인들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기한 유성기에 빠져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고 하는 부분에서 이미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어지간한 예인들이 직접 부르는 노래보다 당대 최고 명창들의 노래를 녹음한 유성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훨씬 신기하고 재미있었기에 굳이 사당패들의 실연을 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사당패들로서는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서울이나 인천 등 대도시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사당패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넷째, 애사당(나이 어린 애기 사당)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는 갑오경장 직후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어린 여자들을 사당으로 유입할 만한 메리트가 없어져 사당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당패들은 갈보 중에서도 하류인 탑앙모리 즉, 삼패(三牌)기생 축에도 못 끼는 최하층이었기 때문에 꺼려지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노래나 기예에 재주가 있으면 사당패가 되는 것보다 대우나 사회적 인식이 훨씬 좋은 기생이 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이 어린 여자들을 신입회원으로 받지 못하자 애사당을 수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이것이 남사당패로 전환된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사실 조선 중엽 사당패의 출현 이후 그들은 정부로부터 한 번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민간풍속 문란이라는 사회적 지탄을 지속적으로 받았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이 어린 여자들을 사당패로 끌어들이기 어려워 졌고 이것이 남사당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신분제의 폐지와 여성 인권의 신장에 따라 예능 등 사회 각 부분에서 많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게 되었는데 사당패에서만은 오히려 여성들이 사라지고 남성화된 경향이 있다.

창극배우만 해도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등 전통적으로 남성 명창들이 주름잡다가 예외적으로 순조 때에 이르러 채선이라는 기생이 명창반열에 오른 이후 개화기에 이르러 김녹주, 배설향, 이화중선, 김초향 등 많은 여류 명창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개화기 서구와 일본 문물의 유입과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어느 방면으로든 여성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이와는 반대로 주로 가창을 위주로 하는 사당패들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공연집단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사당패를 워낙 천시하여 예인 자체로 인정하지 않은 풍조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정노식 선생은 조선창극사에서 여류명창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며 사당들은 아예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할 정도로 무시하였다. 사당패들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비하 풍조가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 나아가 전통예술분야에서도 여성들이 활발히 진출할 때, 오히려 사당패 집단에서는 여성들을 배제하고 남사당으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홍원의(안성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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