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년 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월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복희 申福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한운리
이 명 : 平田粉
형량 : 징역 1년
생몰년도 : 1895~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사람이다. 1942년 5월 6일 꿈 속 노인의 계시를 받았다며 진천군 진천면 성석리로 가서 오후 5시경 백곡천 제방에서 마을 사람 10여 명을 모아놓고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여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또한 천안군 입장, 안성, 장호원, 여주 등을 돌아다니며 수차례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가 불온한 언동이라 하여 체포되었다.
1942년 7월 3일 대전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관련자료
• 判決文(대전지방법원청주지청 1942. 7. 3)
신해갑 辛海甲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형량
생몰년도 : 1915~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경성공립농업학교 3학년을 수학하던 중 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학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적색비사(赤色秘社)와 연락한 사건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가택수색을 당하고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로 압송되 었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 격문사건 및 종연방직 파업사건을 조사하던 중 일제 경찰에 의해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사건이 발각되었다. 이로 동년 9월 25일부터 9 개월에 걸쳐 관련자 4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관련자료
•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신현구 申鉉九
본적/주소 :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송촌리
형량 : 교수 순국
생몰년도 : 1886~1909. 9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사람이다. 1908년 2월 정주원(鄭周源)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으로 활동했다. 동년 4월 16일 수십 명의 동료와 함께 경기도 죽산군 근삼면 백암리에 거주하는 백윤삼(白允三) 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 동년 4∼5월에 걸쳐 백윤삼과 이석진(李碩眞)에게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했다. 1909년 6월 3일 정대준( 鄭大俊)외 수 명과 함께 죽산군 서삼면 시암장 내 여인숙 김운선(金雲先) 집에 들어가 일본인 중원방길(中原房吉) 외 2명을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9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강도 및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9월 29일 대심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대심원형사부 1909. 9. 29)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01, 102면
심광식 沈光植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강덕리 239 / 중국 남경, 중경
형량
생몰년도 1911. 10. 15~1960. 3. 21
계열 : 광복군
포상훈격 :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사람이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제1중대 1소대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를 졸업하고 1936년 3월 남경(南京)에 있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에 참여 했다. 1937년 3월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임시정부 선전부 출판물 간행요원 으로 활동했다. 1942년 10월 24일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43년 3월 20일 임정국무회의 비서처 서무담당을 맡아 1944년 3월까지 근무하였으며, 동년 6월 선전부 총무과 보직을 받고 11월까지 근무했다.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副官處)의 서무과장으로 임명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신한민보(1941. 4. 17 / 1941. 8. 17)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509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61, 385, 439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3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69, 318, 469, 608, 611, 694, 85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1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75, 477, 540, 586, 587, 588, 596, 602, 604, 605, 606, 607, 608, 633, 636, 638, 688, 691, 703, 828, 857, 8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37, 963, 968면 / 6권 296, 309, 608면
심의식 沈冝植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264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78~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 犯罪人名簿(양성면)
심의철 沈冝喆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260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84~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 犯罪人名簿(양성면)
심의태 沈冝台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265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79~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 犯罪人名簿(양성면)
심혁상 沈赫相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릉리 313
형량 : 징역 2년
생몰년도 : 1907. 2. 18~미상
계열 : 국내 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32년 4월 죽산농우학원 교원인 김봉순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경기도공작회를 조직하고 공산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1932년 7월 11일 검거되었다. 당시 죽산농우학원 강사로 공작위원회준비회의 비서부를 담당했다.
1934년 9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
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5월 10일 출옥했다.
관련자료
• 東亞日報(1933. 8. 4 / 9. 15 / 9. 22)
•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안기봉 安基鳳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263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95~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 犯罪人名簿(양성면)
안사원 安四元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낙원동
형량 : 현장 순국
생몰년도 : 1875~1919.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사람이다.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쳐 전개된 안성군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년 3월 11일 읍내에서 50 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3월 28~30일에 걸쳐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31일에는 3,000명의 군중이 군청과 면사무소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등불 행진을 하였으며, 4월 1일에도 5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출동한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 된다.
* 『3·1운동 피살자명부』에는 1918년 5월 안성헌병파견대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1919년 4월경 순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련자료
• 3·1운동 피살자명부
안재헌 安在憲
본적/주소 :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522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형량 : 징역 1년 6월
생몰년도 : 1900. 11. 2~1977. 6. 29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본적은 충북 음성군 출신으로 안성군 이죽면에 거주했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양재옥( 梁在玉)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당시 죽산공립 보통학교 학생으로 4월 1일 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고, 4월 2일 전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등 만세운 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동년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12 / 경성복심법원 1919. 6. 20 / 고등법원형사부 1919. 8. 2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14~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