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8) - 박용희, 박정식, 박정심, 박제안, 박주현, 박천봉, 박화서, 배윤근, 백남규, 서병돈, 서순옥
안성의 독립운동가(8) - 박용희, 박정식, 박정심, 박제안, 박주현, 박천봉, 박화서, 배윤근, 백남규, 서병돈, 서순옥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09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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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9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용희 朴容羲

 

본적/주소 : 경성부 인사정 137 /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매곡리 144-2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84. 12. 11~1959 .5. 16

계열 : 국내 항일

포상훈격 : 애국장(1990)

 

서울 종로 사람이다. 191923·1운동의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 및 함태영 등과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경기도 및 충청도지구 연락 책임자가 되었다. 3·1 운동 후에는 체포된 33인 중 기독교측 유족의 보호에 노력하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11월 경기도 고양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교사· 전도사·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하여 진력 했다. 1921년 귀국하여 이상재·유성준·윤치호 등과 함께 창문사( 彰文社) 라는 출판 사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다가 안성교회( 安城敎會) 전도사로 취임했다.

1927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 新幹會) 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안성 지회( 安城支會) 를 설립하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서울 승동교회·목포 중앙교회·순천 중앙교회의 교역자로 봉직하면서 일본의 천조대신 부인, 궁성요배 반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10월 체포되었다.

19429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광주지방법원형사부 1942. 9. 30)

조선민족운동년감 60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8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300

 

박정식 朴正式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 / 죽백리 552 / 지문리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82. 7. 6~1957. 2. 15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박정심 朴正心

 

본적/주소 : 경기도 음죽군

형량 : 유형 5

생몰년도 : 1878~미상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족장(1995)

 

경기도 음죽 사람이다. 방인관 의진에 가담하여 19078월 경 경기도 죽산, 강원도 원주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두 차례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081010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5년에 처해졌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재판소 1908. 10. 10)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33, 34

 

박제안 朴濟安

독립운동가 박제안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박제안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 190 / 경기도 경성부 아현 378-46

이 명 : 安谷正雄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913. 8. 18~미상

계열 : 국내 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사람이다. 19413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8(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1101일 만기 출소했다.

 

관련자료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박주현 朴周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당목리

형량 : 현장 순국

생몰년도 : 1887~1919. 4. 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1~2일 이죽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년 41일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온 후 두현리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죽산주재소와 면사무소에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이기훈, 이용식, 최창달 등은 두현리에서 도로를 보수하고 있던 인부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권유하고, 윤상구, 조원경과 함께 마을 사람 수백 명과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42일 밤 죽산시장에서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 경찰과 일본군의 발포로 시위자 중 3명이 사망하고, 8명의 부상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3·1운동 피살자명부에는 이죽면 죽산리에서 191942일 총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관련자료

3·1운동 피살자명부

 

박천봉 朴千鳳

 

박천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추곡리 79

이 명 : 朴順七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98. 2. 6~1968. 3. 2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에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이희봉( 李熙鳳) ·손정봉( 孫 正奉) 등과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오후 9시경 동항리( 東恒里) 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 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 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박화서 朴驊緖

독립운동가 박화서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박화서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 읍내

형량 : 징역 16

생몰년도 : 1908. 5. 6~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읍내에서 출생했다. 1925년경부터 일본 기독교 신도의 후원으로 진천군 진천면 성석리에서 보통학교 정도의 사립 성서학교를 경영하고, 교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종사했다. 일본 동경( 東京) 에 유학하였을 때 공산주의에 심취해 현대 사회에서의 빈부의 현격한 차이는 결국 사유재산제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 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5~6학년 학생들에게 작문 수업 등을 통하여 기독교 사상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미한 교육을 시도하여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점을 설파하고 공산주의를 교육했다. 또한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국체를 변혁하여야 한다며 공산주의를 선전하다가 19321월 하순 진천경찰서에 체포되 었다.

19326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6월형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1932. 4. 2 / 경성복심법원 1932. 6. 13)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배윤근 裵允根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구장리 244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85~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 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백남규 白南奎

 

백남규
백남규

 

본적/주소 : 충청북도 금가면 월상리

형량 : 징역 10/ 15

생몰년도 : 1884. 8. 22~1970. 2. 19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독립장(1963)

 

충청북도 충주 사람이다. 본관은 수원( 水原) , 호는 운암( 雲庵) 이다. 대한제국 무관 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 진위대 부위로 근무했다.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이끌고 활동했다.

이때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에게 찾아가 합진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 右先鋒) 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916일 추치( 杻峙) 에서 복병하여 적군 200명을 사로잡았다. 10 월 거석리로 들어가 험준한 요새지를 찾고 있다가 부친이 적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허섭( 許燮) 에게 우선봉을 맡겼는데 나중에 허섭이 패하고 항복하자 다시 돌아와 우선봉을 맡아 의진을 수습했다.

19086월 이강년이 체포된 뒤 부대를 나누어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죽산에서 교전하다가 체포되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아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했다. 1918년에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기려수필 123

독립운동대사전 407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483, 547, 549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20, 242, 24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762

 

서병돈 徐炳敦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6

이 명 : 徐丙勳

형량 : 징역 13

생몰년도 : 1892. 7. 2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 3개를 도끼를 찍어 쓰러뜨렸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 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3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 1921. 1. 23)

東亞日報(1920. 7. 23)

 

서순옥 徐順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 221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884~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11)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19328일 읍내면 동리에서 임일봉, 오귀남 등 주민 20여 명과 함께 마을의 산 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329일부터 41일까지 읍내의 동리, 서리, 장기리, 석정리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5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724일 경성복심법원과 92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13 / 경성복심법원 1919. 7. 24 / 고등법원형사부 1919. 9. 27)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1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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