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년 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월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상인 南相仁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460
이 명 : 南相麟
형량
생몰년도 : 1901~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 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관련자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남상훈 南相薰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추곡리 79
이 명: 南明三
형량 : 징역 2년
생몰년도 : 1885. 4. 26~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11)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밤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동항리( 東恒里) 에 있는 양성주재소에서 홍창수·홍병각 등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 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 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미
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每日申報(1919. 8. 10)
• 東亞日報(1920. 3. 2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423~432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23집 24~25, 324~325면, 제26집 27~30,146면
남시우 南時佑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23
이 명 : 南潤西, 南潤瑞
형량 : 징역 2년 6월
생몰년도 : 1884. 11. 26~1937. 1. 2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 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 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 每日申報(1919. 8. 10)
• 東亞日報(1920. 3. 22)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남용희 南用熙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이 명 : 南龍熙
형량
생몰년도 : 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 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 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관련자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남장우 南璋祐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42
형량 : 징역 2년
생몰년도 : 1892. 7. 28~1936. 3. 2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 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선두에 서서 주재소에 투석 하고 방화했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투석하고 방화했다. 이후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 每日申報(1919. 8. 10)
• 東亞日報(1920. 3. 22)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남정각 南廷珏
본적/주소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04
이 명 : 南英得, 南寧得
형량 : 징역 8년
생몰년도 : 1897. 12. 12~1967. 1. 29
계열 : 의열투쟁
포상훈격 : 독립장(1963)
경기도 용인군 사람이다.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1920년 3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 語學科) 에서 수학하다가 12월 중퇴하고, 장춘·천진·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겨울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고, 1922년 6월 최용덕·이종암의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최용덕·이종암이 서울에 있는 김한(金翰)이 폭탄을 국내에 들여와 투척할 용의가 있는가를 확실히 파악할 것을 부탁하면서 국내로 잠입했다.
서울 수창동 모 여관에서 김한을 만나 거의를 논한 후 상해로 돌아가서 신려사(新旅社)에서 김원봉·최용덕과 만나서 “김한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복명한 뒤 김원봉으로부터 자금 2,000원을 받아 동년 8월 다시 서울에 들어왔다. 자금을 김한 에게 준 다음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려면 안동현에 중계소를 둘 필요가 있으니 스스로 중계인이 되겠다고 말하고 약장수로 가장하여 안동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적당한 집이 없어 중계소 설치계획을 중단하고 다시 입국하여 김한과 폭탄반입에 대해 협의했다. 이후 천진을 거쳐 상해에 가서 김원봉과 협의하고 국내의 김한과 수차 회합하여 그 방법을 논의하다가 동년 12월 28일경 동지 이현준(李賢俊) 과 같이 서울에 도착했다. 운니동 박완명(朴完明)의 집에 투숙하면서 폭탄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자금의 미비로 불발되자 천진에 김원봉을 재차 만나고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 하고자 했다. 1923년 2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여 황금정 2정목 정목여관에서 동지 권동산·유병하·유시태 등과 공모하고 그들에게 권총을 주며 내자동 이인희에게 자금을 요청하기로 했다. 동년 2월 21일 상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丁) 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5,000원을 요구하였다가 3월 3일 체포되었다.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체벌칙위반 및 강도미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감하여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 지하운 동을 펼치고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고 활약했다. 광복 후 귀국하는 교포들의 여비 및 기타비용을 조달하는 활동을 했다. 귀국 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에 협력하며 동지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23. 8. 21)
• 每日申報(1923. 3. 8)
• 고등경찰요사 218, 220, 221면
• 기려수필 28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8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3·426·43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52~279, 397, 733~773면
남진우 南進祐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239
형량 : 태형 90
생몰년도 : 1899. 11. 9~1933. 11. 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05)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원곡면민 1천여 명이 성은고개를 넘어와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에 투석하고 방화했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투석하고 방화했다. 이후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 다.
1919년 12월 4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犯罪人名簿(양성면)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 3·1운동과 안성의 4월 독립항쟁(안성문화원)
남현서 南玄西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132
형량
생몰년도 : 1883~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친 안성군 원곡면·양성 면의 독립만세시위 주동자로서 홍창섭·이근수·이덕순·최은식·이희룡 등과 함께 전개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관련자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맹달섭 孟達燮
본적/주소 : 충청남도 서산군 성연면 명천리
이 명 : 孟達成
형량 : 교수형
생몰년도 : 1881~1910. 7. 18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2000)
충남 서산 사람이다. 1906년 민종식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동년
5월 19일 충남 홍주성으로 진군하여 치열한 교전을 펼치고 홍주성을 점령했다. 5월 31일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으며, 민종식은 재거의를 준비하였으나 체포되어 순국했 다. 이후 충남 정산, 부여 및 경기도 죽산, 양성 등지에서 여러 차례 교전을 치루고, 부여군아를 습격하여 죄수를 방면하는 등 충남 서산, 공주 등지를 넘나들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5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 강도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7월에 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통감부내안(규장각 소장) 제1권 1909~1910년
• 내각고시(규장각 소장)
• 매천야록(황현) 525면
문재홍 文在弘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563
형량 : 징역 6월
생몰년도 : 1895. 4. 19~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건국포장(2017)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서 1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죽산주재소, 죽산우편소 등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아 공소하여 동년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으로 감형되어 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29 / 경성복심법원 1919. 7. 26 / 고등법원형사부 1919. 10. 4)
민호식 閔浩植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석정리 5
생몰년도 : 1892~미상
계열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30년 고등과 요시찰인으로 일제의 감시대상 이었다.
관련자료
•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