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5) - 김중식, 김진수, 김창섭, 김춘만, 김태동, 김태원, 김필연, 김희식, 남상목, 남상억, 남상윤
안성의 독립운동가(5) - 김중식, 김진수, 김창섭, 김춘만, 김태동, 김태원, 김필연, 김희식, 남상목, 남상억, 남상윤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06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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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6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중식 金重植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75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901. 4. 11~1946. 11. 1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 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선두에 서서 투석하여 주재소 기물을 파괴했으며, 이어서 양성우편소로 달려가 투석 으로 유리문을 부수고 사무실 집기류를 앞마당에 끄집어내어 소각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투석하고 방화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 경성복심법원 1927. 2. 24)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2~482

 

김진수 金鎭洙

독립운동가 김진수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김진수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 27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886. 10. 19~1927. 12. 2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2015)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19330일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시장에서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5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9)

 

김창섭 金昌燮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87

이 명 : 金明集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85. 3. 13~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12)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 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주재소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부수었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했다. 또한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호적원부를 소각하고 기물을 파괴한 후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손괴·기물파괴· 공문서 훼기·주거 침입·강도·소요·전화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 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았다.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2~482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3. 22)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3218~220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716~17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25, 429~430, 432, 433~441, 452

 

김춘만 金春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석화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56~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 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김태동 金泰東

 

본적/주소 : 서울 북부 재동

형량 : 유형 10

생몰년도 : 1889~미상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5)

 

서울 사람이다. 대한제국 시위대( 侍衛隊) 출신으로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용인군 용천곡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남상목 의진에 가담하여 종사로 선임되었 다. 송주상·김경화·이시영·강춘선 등 의병들과 함께 충북 음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했다. 그리고 경기도 죽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봉규·민병찬 의진과 연합하여 안성으로 진격했다. 안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그러나 의진 간의 분규로 연합의진이 와해되면서 상경했다. 덕어(德語) 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공부하다가 19083월 체포되었다.

1908713일 평리원에서 유형 10년에 처해졌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평리원 1908. 7. 13)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121

 

김태원 金泰源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계리 / 경성부 죽첨정 3정목 422 / 서울 성북 우이 108

이 명 : 金一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96. 10. 17~1975. 10. 14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충북지방에서 임정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198월 김순호·안교일·신봉균·신현구·유득신·이길용 등과 함께 철혈단(鐵血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써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했다. 동년 9월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공채를 팔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수원·오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19203월에 혁신단(革新團)과 제휴하여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했다. 동년 4월 노백린·김좌진·신현대·윤홍중·박성태·이현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항일단체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제휴했다. 19205월 김상옥·한훈·김동순 등 20여 명과 함께 암살행동반을 조직하여 동년 8월 미국의원단 내한을 기회로 삼고, 총독 암살과 각 관서 파괴 등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192111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예비·출판법위반·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150일 본형 산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22428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21. 6. 21 / 경성지방법원 1921. 11. 15 / 경성복심법원 1922. 4. 28)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2, 203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3

조선민족운동연감 6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30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1042, 1045, 1047, 1062, 1068

 

김필연 金必然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200

이 명 : 金君弼

형량 : 옥중 순국

생몰년도 : 1880~1920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19926일 고등법원 예심계에서 신문을 받았으나 옥중에서 순국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김희식 金熙植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79

이 명 : 金梁福

형량 : 징역 5

생몰년도 : 1898. 11. 15~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그는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 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每日申報(1919. 8. 10 / 1921. 1. 23)

東亞日報(1920. 7. 23)

 

남상목 南相穆

 

남상목

 

본적/주소 :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 190 / 경기도 용인군 용천곡

형량 : 옥중 순국

생몰년도 : 1876. 4. 12~1908. 11. 4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광주 출신이며 본관은 영양( 英陽) , 자는 문일( 文一) 이다. 19077월에 경기도 용인군 용천곡을 중심으로 의병 50여 명을 모으고, 구식총 40여 자루와 서양총 10여 자루의 무기를 가지고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송주상·김태동 등이 새로 의진에 참여하자 강춘선을 후군장, 김경화, 이시영은 포군으로 재정비한 뒤 음성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패전군 30여 명을 이끌고 죽산의 칠장사 에서 전봉규 의진과 연합, 안성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0811월 판교에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심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114일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121

 

남상억 南相億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239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1902~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남상윤 南相胤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 60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73~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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