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독립운동가(3) - 김봉현, 김봉환, 김사근, 김석봉, 김성문, 김성재, 김수창, 김순서, 김시연, 김영배, 김영서
안성의 독립운동가(3) - 김봉현, 김봉환, 김사근, 김석봉, 김성문, 김성재, 김수창, 김순서, 김시연, 김영배, 김영서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04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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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4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4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봉현 金鳳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446 / 칠곡리 106

이 명 : 金舜九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85. 9. 16~1930. 3. 28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 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횃불을 들고 이유석·남현서·조경수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주재소에 투석하고 방화 했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와 금고 등을 끄집어내 불태우고, 우편소 주변의 전봇대를 찍어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투석하고 방화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김봉환 金鳳煥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석정리

형량 : 16월형

생몰년도 : 1874. 2. 17~1945. 5. 6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경주김씨 상춘공파 19대손으로 김동식 의병장의 아들이다. 1907년 김동식이 정미 7조약 체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했다.

19078월 안성을 떠나 무주 덕유산, 장수, 남원을 거쳐 지리산에 요새를 구축하고 의진을 형성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이석용(李錫庸) , 고광순(高光洵) 의진 등과 합진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했다. 동년 910일 순창(淳昌)에서 순창우체국을 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915일에는 다시 동복(同福)으로 돌아와 동복순사주재소를 습격한 후 19일에 구례(求禮)와 영광(靈光)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무기 등을 확보했다. 1908년에는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소속되어 전남 일대에서 일군과 접전하였다고 전한다. 1909년 의병장이 되어 부하 30명을 거느리고 일군과 접전하다가 927일 전남 무안군 발다면(무안 서방 3지점) 에서 체포되어 강제 노역 16월형을 받았다. 19455월에는 군자금 조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주안(朱安)에서 관헌과 격투 끝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경주김씨세계보(1971)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651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128, 129, 149, 155, 156, 181

 

김사근 金士根

 

본적/주소 : 경기도 양지군 주서면 어득운리

형량 : 유형 5

생몰년도 : 1885~미상

계열 : 의병

포상훈격 : 애국장(1995)

 

경기도 양지군 사람이다. 1907년 음력 9월경 임오교 의진에 가담하여 동지 수백 명과 함께 무장하고 경기도 죽산·광주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초 다시 정주원 의진에 들어가 용인·죽산 등지를 무대로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동년 1월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음력 3월 에는 용인군의 여본구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체포되 었다.

19091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5년에 처해졌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재판소 1909. 1. 26)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84, 85

 

김석봉 金錫鳳

독립운동가 김석봉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김석봉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장기리 272 / 경성부 가회동 47

이 명 : 平秀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908. 2. 6~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미포상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사람이다. 1932년 일본공산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19321119일 기소되었고, 19331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시작 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아 동년 1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5118일 출옥했다.

 

관련자료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성문 金成文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 161 / 금석리

형량 : 징역 8

생몰년도 : 1891. 8. 19~1954. 5. 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건국포장(2008)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사람이다. 191942일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시장에서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19195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받아 공소 하였으나 동년 7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5. 9 / 경성복심법원 1919. 7. 11)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11

 

김성재 金聖在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구장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878~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미포상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김수창 金壽昌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형량 : 태형 60

생몰년도 : 1900~미상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미포상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중 횃불을 들고 성은고개를 넘어온 원곡면민 1천여 명과 합세했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 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410일 안성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관련자료

犯罪人名簿(양성면)

 

김순서 金順西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형량 : 징역 10/ 옥중 순국

생몰년도 : 1896. 4. 19~(1922)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2014)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 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 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에 투석·방화하고,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와 금고 등을 끄집어내 불태웠다. 또한 우편소 주변의 전봇대를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키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 했다.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김시연 金時然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8 / 죽백리 67

이 명 : 金致三, 金師三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86. 7. 2~1944. 12. 6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 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김영배 金永培

독립운동가 김영배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독립운동가 김영배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보동리 19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915. 12. 20~미상

계열 : 국내항일

포상훈격 : 미포상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사람이다. 양성공립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한 후 농업에 종사했다. 1938722일 오후 10시 자택에서 오선근, 김백현, 김길현, 김삼현, 김규현, 김영옥 등에게 러시아가 중국을 돕고 있으므로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패할 것이고 일본이 패하여 조선이 독립하면 좋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또한 19391 13일 오후 1030분 자택에서 역시 오선근, 김백현, 김길현, 김삼현, 김규현, 김영옥 등에게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있는 것 같고 세계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391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형법 위반, 해군형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39. 11. 2)

 

김영서 金永西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298 / 죽백리

이 명 : 金光五

형량 : 징역 7

생몰년도 : 1889. 10. 17~1959. 6. 26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저녁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 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횃불을 들고 이유석·남현서·조경수, 김봉현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투석·방화했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와 금고 등을 끄집어내 불태 우고, 우편소 주변의 전봇대를 찍어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투석하고 방화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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