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일간의 해방” 100년의 기억
(기고) “2일간의 해방” 100년의 기억
  • 시사안성
  • 승인 2019.02.2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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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은 3·1만세운동을 ‘4·1만세항쟁또는 ‘2일간의해방이라 부르는가?

또한 안성을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라 부르는 이유도 경기 안성, 평북 의주, 황해도 수안을 일제가 민족 대표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이 세 지역을 언급하며 재판을 이끌었기 때문에 전국 3대 의거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그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4·1만세항쟁‘2일간의해방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매일 그 날의 일을 되뇌고 살아도 당장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이다. 우리도 후손들에게 안성31운동 정신을 일깨워 주고 가르친다고 해서 크게 변화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득실을 따지고 변화가 없다고 해서 멀리하고 팽개쳐 놓아서도 않될일이다. 지금까지 지켜온 100년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또 다시 100년의 가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안성 31만세운동 정신을 가르치고 기억, 계승해

나아가야 한다.

100년 전 191931일 서울 탑골 공원과 전국 7개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시작된 만세시위는 삼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197회는 지금의 북한 지역인 북부지방에서 활발했다. 그런 이유로 전국3대 실력항쟁지가 안성과 함께 두 곳은 북한 지역에 있는 것이다. 3월 중순을 넘어 경기도 중남부 지방으로 이어진 만세시위는 사월 초하루 안성 원곡·양성에서 “2일간의 해방이라는 절정기를 맞이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안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하여 대통령 직속 기구인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기록하고 있는 안성 31만세운동을 그대로 소개한다.

 

안성 31운동

안성군의 31운동은 311일 안성읍을 시작으로 죽산양성원곡면 일대에서 연이어서 격렬히 전개되었다.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30일 윤순철(尹順哲)고성준(高成俊)한국초(韓國初) 등이 주동이 되어 태극기 70장을 만들어 이 날 오후 장터에서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튿날 오후에는 주동섭(朱東燮)한삼석(韓三石)권업동(權業同) 등이 주도하여 주민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성군내의 가장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은 양성면과 원곡면의 합동시위였다. 처음에는 각각 별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나, 양성면에서 합류하였다. 4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은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과 합류,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관주재소와 숙직실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경찰에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끌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한편 이죽면에서는 이기훈(李起薰)윤상구(尹商求)이응식(李應植)최창달(崔昌達) 등이 주도하여 41일 도로개수 부역에 나온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 일죽면에서는 42일 오순경(吳順景)조성행(趙聖行) 등이 200여 명의 주민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안성군 이죽면 31운동

안성군 이죽면은 구 죽산군 시절 군소재지였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이죽면이 되었다. 안성군의 31운동은 매우 치열했다. 1919311일 안성 읍내에서 50명의 시위가 있었다. 그 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다가 3305~600명의 시위, 3313,000명의 시위가 다시 안성 읍내에서 벌어졌다. 41일에는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일어나 양성주재소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우편소, 양성면사무소, 일본인 상점들을 파괴하였다. 이 원곡과 양성의 만세시위는 일제가 민족 대표 재판에서 언급했던 평북 의주군 옥상면 시위, 황해도 수안군 시위와 함께 전국 3대 의거 중 하나이다. 41일 이죽면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명은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두현리민 등 수백 명과 함께 죽산경찰서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몰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때 두현리 이기훈(李起薰)과 이응식(李應植), 장재리의 최창달(崔昌達)은 두현리에서 도로 보수 부역을 하던 인부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하며 죽산 시위에 참여하게 하였다. 42일 죽산시장에서 이죽면 장원리장계리죽산리매산리 등지 주민 2,000명이 야간에 모여 죽산경찰관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은 이날도 태극기를 받들고 죽산시장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기록하고 있는 안성관련 사건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100년도 우리가 찾아내고 발굴해야 할 숙제이고 책임이다. 그 역사 속에 너무 많은 독립운동가와 희생자 가족들의 묻힌 삶의 이야기도 우리 모두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우리 안성 선열들...

100년 전 양성 · 원곡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우농 이유석 선생님의 초상화를 처음으로 공개하고자 한다.

이유석 선생 초상화
우농 이유석 선생 초상화

 

우농 이유석 선생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경주이씨 알평공 34세손

1892년 원곡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 및 주역 등은 물론 한의학, 지리학까지 능통하였다.

3.1운동 당시 33

 

3.1독립운동이 우리에겐 100년 전 과거사일줄 모르나 그 가족과 자손들에게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가슴 아픈 일이다. 100주년 행사에 하나로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는 안성의 독립운동 및 3.1운동과 근현대사 관련 유물 및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3.1운동기념관에 전화를 걸어 독립유공자 우농 이유석 선생님의 사진을 보유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아직 사진을 수집하지 못했다고 한다. 안성3.1운동 기념관 내 광복사당에 361위의 독립유공자 위패를 모시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의 사진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독립운동을 한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으로 그 가족들은 독립운동의 흔적이란 흔적은 모두 없애고 숨어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우리 역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우농 이유석 선생님의 초상화를 소장하게 된 사연은 필자가 2011년 안성문화원 근무당시 안성의 인물을 네 분 선정하여 안성맞춤 랜드 호수주변에 흉상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었다. 안성문화원에서는 흉상 건립 추진위원회 심의를 거쳐 네 분을 선정하였다.(독립유공자 이유석, 안법학교 설립자 공안국 신부, 의병장 홍계남 장군, 안청학교 설립자 김태영) 당시 흉상건립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사진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농 선생님의 직계 자손인 이규정님을 만나 소장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안성3.1운동기념관에 이유석 선생님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이번 100주년을 통해 알게되어 사진을 안성3.1운동기념관에 전달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11년 직계 자손이신 이규정님은 초상화를 전해 주시면서 왜 사진 한 장을 보관하고 있지 못했는지 사유를 설명하고는, 선조들의 사진 한 장 보관하지 못한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집안에서는 이유석 선생님과 관련된 사소한 모든 흔적은 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모든 분들이 똑같이 당한 실정이었다. 그 후 자손들이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100년은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과 함께 그 가족들의 삶도 살펴보고 재조명 하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31운동 100주년 맞아 중앙 정부와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대대적인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영하고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 안성 시민들의 분위기는 너무도 조용하고 관심조차도 없는 것 같다. 안성시는 매년 42일 안성문화원 주관으로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4·1만세항쟁과 2일간의해방이라는 주제로 각종 기념행사를 치러오고 있다. 금년에도 42(화요일) 오전 10시부터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각종 기념행사가 치러질 예정이다.

대한민국의 자랑할 만한 역사도 중요하지만 아픈 역사도 제대로 가르치고 기억해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 3.1일 삼일절에는 태극기도 게양하고 42일에는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치러지는 ‘4·1만세항쟁’, ‘2일간의해방’ 100주년 기념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등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에 대한 예우와 감사하는 마음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광복사 사당내부모습, 안성3.1운동기념관 내 광복사당에는 안성지역 독립운동가 316명(순국선열 32위, 애국지사 284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광복사 사당내부모습, 안성3.1운동기념관 내 광복사당에는 안성지역 독립운동가 316명(순국선열 32위, 애국지사 284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임상철 전 안성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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