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로의 전환배경 Ⅱ
남사당패로의 전환배경 Ⅱ
  • 시사안성
  • 승인 2019.02.26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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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22
덜미(꼭두각시 놀음)
덜미(꼭두각시 놀음)

당시 여자인 사당과 남사인 거사가 같이 공연을 다니던 사당패가 남사당패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요인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당패에 대한 금법. 둘째, 외국에서 온 새로운 공연의 등장. 셋째, 유성기의 보급.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이어린 사당을 지칭하는 애사당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를 차례로 한번 살펴보자.

우선 사당패에 대한 금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조선시대 관찬사서에서는 거의 이들을 패륜 및 역모를 할 집단 또는 백성들에게 폐해를 주는 무리들로,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사찬서인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도 조창마을에서 금해야 할 첫 번째로 사당을 꼽고 있는 등 이들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없어져야 할 무리들이었다.

1796일성록에 사당패들을 금해야 한다고 한 내용이나, 이옥의 사당사당에 대한 금법으로 모두 잡아다가 계집종을 만들었으나 법이 오래되어 관청에서 규찰하지 않자 다시 나타났다라고 하는 부분으로 보아 자주 탄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 단속을 할 때는 사당들을 잡아다 관비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은 단속을 피해 상당 기간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였는데, 단속에 걸린 때에는 사당들이 잡혀가기 때문에 전승이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사당패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19세기 말에도 공연단에 대한 단속을 하였다. 당시의 황성신문 등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무동패와 같은 잡희들은 기본적으로 엄단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으며, 이들이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허가 문제로 자살을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허가사항은 경무청 소관이라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각 경찰서에 따라 재량껏 허가를 내 주어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는 패들도 있었다. 무동패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당패와 답교패들과는 명확한 구별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시 황성신문에 나오는 무동패가 구체적으로 어떤 패들을 지칭 하는지 특정 지을 수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전문예인패라는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이 시기 역시 전문예인패들에 대한 금단정책이 사당패들의 소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전문예인패들에 대한 금단정책의 영향으로 사당패들이 사라졌다면 당시 사당패 이외의 다른 전문예인집단은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또 비슷한 전문예인집단인 남사당패는 도리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사당패는 조선 중기 그들의 등장과 함께 계속하여 금해야 할 대상으로 나온다.

사실 조선시대 여러 예인집단 중에서도 가장 배척을 받아 온 것이 사당패들인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매춘을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예인집단이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음에 반하여 사당패는 여성들이 절반이며, 이들이 매춘을 한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정부에서 예인집단에 대한 강력한 금단정책을 펼칠 때, 매춘을 함으로 인하여 쉽게 노출되는 시선을 피하고자 전혀 새로운 집단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매춘을 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사당들을 모두 내보내고, 남자들로 채운 것이다. 이처럼 기존 놀이패에 대한 금단정책을 강화하자, 그것을 피해가려는 풍선효과(風船效果, balloon effect)로 새로운 형식의 공연패를 만든 것이 남사당패로 보인다.

살판
살판

 

사당패들은 그들의 탄생과 더불어 반복되어 온 금법을 생각해 보면 사당패들은 그 기량 전승의 어려움 때문이라도 고난이도의 체기를 위주로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금법에 따라 수시로 공연을 금지 당하고, 또 잡혀서 노비 생활을 해야 하는 사당패들에게 고난도 기술의 전승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당패들의 공연내용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훈련이 되는 소고춤과 개인적인 기량인 노래 등을 위주로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공연내용은 결국 조선 말 변화기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한 공연인 남사당 체제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외국에서 온 새로운 공연의 등장을 살펴보면, 19세기 말엽의 조선은 모든 면에 있어서 전에 겪어보지 못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세도정치, 삼정문란, 외세침략,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 대내외적인 급격한 변화에 놓이고 신문화가 유입된다. 그리고 공연 면에서는 일본과 중국에서 새로운 기예가 들어오는 시기이다.

고려대학교의 신근영 선생은 일본인 거류민이 남긴 경성발달사(京城發達史)를 인용하여, 1888년 조선에 체류하는 348명의 일본인 중에는 흥행업(興行業)’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어떤 것을 흥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업행태인 유기장(遊技場)과는 분리해서 표기한 것을 감안할 때 공연물의 한 형태로 추정하여 당시 일본인의 공연이 열려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1894하재일기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마술 등 전문적인 기예를 돈을 받고 보여주고, 이현동에 기국(技局)을 만들어 상설공연까지 한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록 사이 시대의 근접성으로 보아 당시 일본인들의 흥행업이 바로 기국에서 한 마술 등의 공연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공연을 한 내용은 일본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894년 일본의 도신문(都新聞)에는 “4~5년 전부터 류큐, 조선 등에 도행해 살던 데지나시(手品師 ; 마술사, 환술사) 동인은 이번 청국 천진에서 청 황제의 천람을 받자옵는 뜻으로 초빙되어라고 하여 1890년에는 이미 일본인 흥행사들이 조선에서 거주하며 공연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1902년에는 일본에서 곡예단이 들어와 지금까지 조선에서 보았던 연희와는 전혀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일본의 새로운 공연은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들은 기를 들고 북을 치며 거리를 다니며 홍보를 하였는데 아이들과 시골사람들이 따라다니며 힘들고 수고로운 줄 모르고 구경 하였으며, 최면술 등 각종 신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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