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로의 전환 배경Ⅰ
남사당패로의 전환 배경Ⅰ
  • 시사안성
  • 승인 2019.02.1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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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21
길놀이
길놀이

사당패들은 구한말 무렵 수백 년간 이어온 사당과 거사로 이루어진 사당패에서, 남자들로 구성된 남사당패로 변신을 한다. 이들은 사당이라는 전통과 명칭, 그리고 지역적 기반을 계승하면서도 다채로운 체기를 받아 들여 새로운 내용의 공연을 기획한 것이다.

남사당패로의 전환 초기에는 춤과 노래, 그리고 소고를 치는 수준인 사당패의 기예를 이었으므로, 남아있는 거사만으로는 다양한 체기를 연행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예인들을 영입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당시의 예인들은 이합집산이 심하여 자기들만의 독자성을 가지고 공연단을 지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패에 있는 기예자를 모아서 단체를 만들기가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신생 예인단체라도 기획력만 있으면 다른 놀이패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가진 예인을 모집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공연을 다니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승무, 태평무, 살풀이의 대가 한성준 선생은 22세 무렵인 1895년경에 굿중패, 남사당, 모래굿패에 섞여 다니며, 당굿에 가서 춤추고, 어른 생신 때에도 가서 놀았다고 회고 하였다. 즉 굿중패와 남사당패, 모래굿패 등 어디든지 합류를 하고, 잔칫집에 불려가는 등 개인적인 공연마저 불사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솟대쟁이패 출신으로 남사당패에서 활동한 송순갑은 살판쇠가 솟대쟁이패에서 인정받게 되면 남사당패에 불려가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이는 남사당패에서 체기를 중심으로 하는 이종의 연희자들을 받아들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00년 무렵은 전래 공연패가 많이 없어지는 때이므로, 여기에서 흘러나온 공연단이 다른 공연팀에 들어가는 등 이합집산이 심한 시기여서 다른 공연패의 기량을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은 인형극의 경우 사당패에서 주로 하고 가면극은 사당패들도 하지만 산대도감에 소속된 사람들이 했는데, 이들은 후에 탈꾼이라고 지칭 했다고 하여 꼭두각시놀음과 덧뵈기 계통을 다르게 분류하였다.

열두발 상모
열두발 상모

그런데 꼭두각시놀음과 덧뵈기는 사당패나 탈꾼 같은 전문가들만이 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방에서 전해오던 민간 놀이였다. 고려대학교 서연호 교수는 일제강점기 미라무타의 인형극에 대한 연구 성과를 설명하며, 조선의 인형극은 구파발 및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등 각 지방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 조선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 인형극 등으로 표기되는 꼭두각시놀음이 전국 여러 곳에서 행해진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내용상으로 보아 당시 박첨지놀음 등의 인형극 명칭은 꼭두각시극뿐만 아니라 덧뵈기를 지칭하기도 하는 등 일반인들은 명확하게 구분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지 기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꼭두각시놀음 및 덧뵈기는 마을 자생적으로도 행하여졌고 사당패 및 전문놀이패에 의하여서도 각각 행하여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김재철 선생은 조선연극사에서 사당패들은 곡예와 가창이외에 산대극 혹은 인형극을 극히 단순하게 고쳐서 연출 했다고 하였다. 산대극이라면 일반적으로 탈놀이를 의미하기에 사당패들은 덧뵈기와 꼭두각시놀음을 아주 단순한 수준으로 하였다는 말이다.

덧뵈기나 꼭두각시놀음은 미타무라(三田村)의 조사나 조선의 향토오락에 나오는 것처럼 일반인들도 전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당패들이 극히 단순하게 고쳐서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일반인 보다는 약간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이들 이외에 덜미와 덧뵈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놀이패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기산풍속도의박첨지 노름하는 모양이라는 그림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이 그림 어디에도 사당패로 볼 만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덜미를 전문적으로 하는 놀이집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재철 선생은 사당패에서 가면극과 인형극 배우는 전부 남자라고 하여 덧뵈기나 덜미 같은 경우에도 남자들의 공연으로 보았다.

박첨지 놀음하는 모양(기산풍속도)
박첨지 놀음하는 모양(기산풍속도)

사당패에서 이러한 덜미와 덧뵈기 공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이는 송석하 선생과 김재철 선생의 보고 이전에는 그들이 꼭두각시놀음과 덧뵈기를 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극히 단순하게 고쳐라는 문맥으로 보아서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시작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사당패에서 가면극과 인형극 배우는 전부 남자라는 말에서도 남사당패의 느낌이 드는데, 아마도 과도기 남사당패에서 공연을 시작하여 지금의 여섯 마당 중 두 가지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패들의 공연은 기본적으로 부채춤과 노래 그리고 소고를 치며 판놀음을 하는 수준으로 이들의 공연에서 현재 남사당패들이 하는 줄타기와 살판, 버나 등과 같은 체기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만의 고유 명칭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유랑예인패들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각 놀이패 간의 이합집산이 시작된다. 이때는 일본, 중국에서 새로운 기예가 전래되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유랑예인패 중에서도 세력이 번성했던 사당패,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청룡리 사당패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단순히 소고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공연에서 살판, 7무동, 얼른, 꼭두각시놀음 등 체기를 접목시킨 것이다. 기존의 사당거사들로서는 공연하기 어려운 종목들은 이종(異種)의 공연팀들을 영입하여 다채로운 종목의 공연을 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리를 위주로 하는 사당들은 점점 줄어들고, 남아있는 거사들이 이종의 공연팀들과 같이 새로운 형식의 공연 종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남사당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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