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덕뫼에서 세거 500년
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덕뫼에서 세거 500년
  • 시사안성
  • 승인 2018.04.25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 중시조 정무공 오정방의 공훈
정무공 오정방 묘
정무공 오정방 묘

 

오정방(吳定邦, 1552년 명종 71625년 인조 3)은 어모장군 충무위 부호군인 오수천(吳壽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과 급제 후 경상좌도 수군 우후를 한 삼촌 오수억(吳壽億)에게 입양되었다.

공은 1583(선조 16)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문과에도 합격한 문무겸전의 인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광해군의 폐모사건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을 거치는 국가의 일대 혼란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공이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을 때 이율곡은 참 영재로다. 이번 과거에서 인재를 얻었도다라고 하면서 공을 극진히 칭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생모상을 당해 덕봉리에 있는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살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국난을 당하였으니 상복을 벗고 공무에 복귀할 것을 명하면서 도총도사로 임명했다. 선조 임금이 북쪽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함)시 철령전투에 참전했다.

공은 신기에 가까운 궁술로 왜적을 사살하며 위기에서 탈출하여 주위에서 모두 공의 용맹과 활 솜씨에 탄복했다. 공은 곧바로 의병 수 천명을 모집하여 영흥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승진하고 계속하여 도총경력 곽산군수로 전직되었다.

정무공 오정방 신도비
정무공 오정방 신도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 공은 창성부사로 승진되고 명나라 수군 접반사로 명나라 수병장 복일승을 영접하여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다. 공은 여순항에 이르러 복일승을 영접한 후 그 일행을 풍랑으로 험해진 바닷길을 침착하게 대처하면서 안내하였고, 이어서 명나라에서 원조하는 양곡 10만석을 운반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러한 공로로 공은 내금위 대장, 포도대장을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또한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선조가 재위 41년 만에 붕어(崩御: 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시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1608). 공은 즉위식에 참석하여 임금의 모습과 행동을 면밀히 살핀 후 집에 돌아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한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 이 무렵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는 문제로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물을 때 여러 대신들은 모두 두려워 묵묵부답이었으나 공이 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당당히 신은 무부로 사략 초권만을 읽었는데도 찬찬히 나아가 간특한 것에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공이 임금 앞에서 당당히 바른 말을 하는 그 정의로운 기개를 장하게 여겼다.

공이 1622(광해군 14)에 전라우수사로 있다가 서울로 전근될 때 군졸들이 수레를 막고 길에 누워 행렬을 막을 정도로 공을 존경했다.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등극하자(인조반정 1623, 광해군 15) 공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고 이괄의 난 때(1624년 인조 2)는 왕을 공주로 모시는 호가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공은 1625(인조 3)74세로 돌아가셨다. 이때 임금은 조문하고 부의를 후하게 하라고 명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후 공은 병조판서로 증직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이며 의병장이었다. 목민관일 때는 백성을 자식같이 보살폈으며, 불의에는 비록 임금일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언하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안성사람 안성이야기2005

천파문집1989.

족보식 방목열기2000.(임낙정 편 동광출판사)

안성군지1990.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