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의 탄생
남사당패의 탄생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1.22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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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20
2017년 바우더이 축제 줄타기 장면1
2017년 바우더이 축제 줄타기 장면1

 

양평에서 분원 공소의 공인역할을 한 지규식이 1891~1911년까지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놀이패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 사당패들에 관한 기록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 189593

사당패들이 들어와 네거리에 판을 벌이고 밤새도록 놀며 노래를 불렀다.

 

. 189847

무뢰배들이 8일에 논다고 하며 악단을 거느리고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다.

 

. 189848

무뢰잡류들이 종일 놀이를 하였는데 볼 만한 것이 없었다. 허황되고 과장된 소문은 가소롭고 싫었다.

 

. 1898828

산대괴뢰패에게 75전을 행하로 주었다.

 

. 18991120

광주 굿하는 승패들이 와서 먼저 가마솥 위에서 놀다가 회사로 내려와 우리 집 문 앞에서 나와 놀아 돈과 쌀을 모두 지급하였다.

 

. 1900116

윗동네 무동이 회사에 들어와 놀아 40냥을 행하 하였다. 밤에 두능 무동패가 원중(院中)에 들어와 상하동 무동들과 함께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 190048

동중(洞中)에서 천인계(千人契)를 만들었는데 들어가는 바가 많지 않아 우선 두었다. 산대패를 설치하여 종일 구경하였다.

 

. 1900113

수원 승도패가 원중에 들어와 유희를 하겠다고 하여 동중에 신칙하여 집을 배정하여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하였다.

 

. 1901523

괴뢰들이 원중으로 들어왔다.

 

. 190275

양주에서 무동패가 와서 하룻밤 동안 놀이를 하였다.

 

. 1905723

남사당패가 해가 저물어서 왔다. 저녁을 주게 하고 내일 아침에 내어 보내라고 신칙하였다.

 

. 1906628

괴뢰패들이 아랫마을에 들어와 노치(老痴)’로 밤놀이를 벌였다.

 

1895년 자료 에는 사당패들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하였으나, 1905년 자료 에는 남사당패들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지규식이 놀이패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음은 그의 일기에 보이는 공연단에 대한 다양한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

무뢰배, 무뢰잡류, 산대괴뢰패, 승도패, 무동패, 괴뢰패, 굿승패 등 여러 가지 놀이패들을 나열한 것으로 보아 그들에 대하여 정확한 명칭을 알고 기록해 놓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1895~1905년 사이에 사당패가 남사당패로 바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2
2017년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2

 

앞선 연재에서 살펴본 독립신문황성신문에서 당시 놀이패 이름이 나오는 구절을 다시 한 번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즁과 굿즁패와 와 녀샤당패와 남샤당패와 초란이와 숏대쟝이패와 산듸패와 풍각쟝패 등군패의 구걸이며  또 모든 병신 걸인배의 동냥이며  또 무삼 잡동산이라 칭 하.

- 獨立新聞, 18981022

 

我國處容舞項莊舞船游樂이니 儺禮都監이니산두도감)하는것이 不過一時戱遊로대 稍有可觀하風襟暢叙할만하今所謂舞童이란것은 或稱男沙當하或稱踏橋牌하扮男爲女도하幻俗爲僧도하.

- 皇城新聞, 1900331

 

위의 기사처럼 1898독립신문에는 여사당패와 남사당패가 모두 언급 되어 있어 당시에는 여사당패와 남사당패가 공존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사와 여사당패와 남사당패라고 호칭하여 남사당을 거사와는 다른 집단으로 거론하였다. 결국 남사당패는 거사와는 다른 집단이며, 남자들로 이루어진 별도의 공연패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여사당패와 남사당패가 공존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초기의 남사당패에서는 아마도 남사당패라고 칭한 집단에 남여 사당들이 거사의 통솔 하에 같이 공연을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의 황성신문에는 소위 무동을 남사당 또는 답교패라고 하고 남자가 여자로 꾸미기도 하고 중으로 변장을 하기도 한다 하였다. 이 두 개의 신문기사가 남사당에 대하여 나오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이다.

이와 같이 전문예인인 남사당패에 대한 명칭이 나오는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따라서 사당패는 19세기 말부터 전환을 시도하여 1900년대 초에 완전히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위패 남사당의 시작을 덧뵈기쇠인 이운선이 원각사에서 공연한 데에서 찾는 것과 비슷한 시기이다. 하재일기 및 당시 신문기사로 볼 때 19세기 말에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수년에 걸쳐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명칭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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