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의 소멸과 남사당패로의 전환 Ⅰ
사당패의 소멸과 남사당패로의 전환 Ⅰ
  • 시사안성
  • 승인 2019.01.08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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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19
2018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상설공연 中
2018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상설공연 中

사당에 대한 조선시대 문헌자료는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나, ‘남사당이라는 용어가 나온 문헌자료는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당이라 함은 당연히 여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남사당, 여사당이라는 말을 별도로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보면 여자를 사당’, 남자를 거사라고 부르므로 남자들로 구성된 패는 거사패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남사당패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남사당패의 정체성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후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문헌상으로 사당과 거사의 용어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손에 부채 하나를 가지고 장터를 만나면 연희를 하고, 집집 문전을 따라 다니며 노래를 불러 남의 옷과 음식을 도모하는데, 방언에 이를 일컬어 사당(社黨)’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를 일컬어 거사(居士)’라고 한다. - 이옥, 사당-

 

居士社堂이 나오는데

몹시 늙고 병든 몸

거사는 떨어진 패랭이 쓰고

사당은 남루한 치마 걸치고

- 강이천, 남성관희자-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남아 있었다. 내가 나이 어릴 때 괴산 고을에서 사당패를 보았다. ()에는 남녀가 한데 있으니 남자를 남사당(男社堂) 또는 거사(居士)라고 하고, 여자를 여사당(女社堂)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 되는 자를 모갑(某甲)이라고 했다. 한 모갑(某甲)의 통솔 밑에 남자가 8명 또는 9명에 여자가 한두 명씩은 있었으니 모두 묘령(妙齡)의 여자였다.

- 이능화, 조선해어화사 (1927) -

 

순전한 산대극단(山臺劇團) 이외에 사당패라고 하는 기형적 극단이 있었으니, 남녀 사당 수십 명이 일단(一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 모갑(某甲)의 영솔 하에 이곳저곳에 가설극장을 만들고 곡예·가창(曲藝歌唱)을 하였다.

--- 중간 생략 ---

사당패들은 곡예와 가창 이외에 산대극 혹은 인형극을 극히 단순하게 고쳐 가지고 연출하였기 때문에 이에 附記하여 둔다. 그리고 가면극과 인형극 배우는 전부 남자인데, 사당패만은 남녀 배우가 모여 있는 것은 한 특색이라고 하겠다.

- 김재철, 조선연극사 (1933) -

 

*박첨지 : 이 동리(洞里)에 남녀사당(男女社堂)이 놀음 놀기로 구경 가려고 합니다.

--- 중간 생략 ---

*박첨지 : 사당아이는 손목 잡고 돌이고 주기와, 어여쁜 미색(美色)은 좋고 좋은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입에 물고 주기와, 거사 불러 거사전 주고, 모개비 불러 행하해 주고 나서...

- 김재철 조선연극사(1933) -

 

사당패는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년 전까지도 떠돌아 다녔다.

이 패라는 것은 우리 조선에서 한 단체를 일러 말하기를 패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사당패에는 남사당패 여()사당패 등 두 패가 있다.

남사당패라는 것은 남자들끼리만 모아서 패를 지은 것이오.

여사당패라는 것은 여자들끼리만 모아서 패를 지은 것을 일음이다.

그런데, 남사당패를 특별히 또한 별명을 지어 거사(居士)라 하고 그 두목을 모갑(某甲)이라 하니, 그 칭호가 매우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 조광(朝光), 28, 없어진 민속 사당패(社堂牌)백화랑, (1936) -

 

사당(社堂)은 당연(當然)히 여자(女子)이라야 하는 것이지만 조선(李朝) 말기(末期)에 이르러 남사당(男社堂)이란 것이 생겨서 여사당(女社堂) 남사당(男社堂)의 명칭(名稱)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勿論) 남사당(男社堂)의 조직(組織)도 여사당(女社堂)의 것과 동일(同一)하지만 남사당(男社堂)은 계간(鷄姦)을 파는 것이 다르다.

- 송석하, 사당고(1940) -

 

자료 이옥 사당에서 이옥은 장터와 집집을 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사당’, 그리고 그 우두머리를 거사라 한다고 하여 남녀가 같이 공연을 다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강이천도 남성관희자에서 거사와 사당이 나오는데라고 하여 같이 다니는 집단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능화는 조선해어화사에서 모갑 아래에 거사가 8~9명 그리고 사당이 1~2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거사 1명에 사당 1명이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는 송석하의 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능화의 말대로 거사 8~9명에 사당 1~2명이라면 사당패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사당이 적은 비율이므로 송석하의 말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철의 조선연극사에서는 남사당과 여사당이 같이 섞여 있다고 하여, 남자 즉 거사는 남사당’, 여자들은 여사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조선연극사에 나오는 이 각본이 채록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19313월 경성제국대학 졸업 때 제출된 논문에 실린 자료이므로 그 직전일 것으로 추론한다.

2018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상설공연 中
2018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상설공연 中

당시 늙은 인형사인 박영하와 전광식의 구술에 의해 채록된 자료이니 만큼, 그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191020년대에는 남녀사당이라고 하는 사설이 일상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화랑의 없어진 민속 사당패와 송석하의 사당패에서는 남사당은 남자들끼리 패를 지은 것이고 여사당은 여자들끼리 패를 지은 별도의 집단이라 하였다.

그런데 앞의 이들 기록만 보아서는 19세기말에 남사당패와 여사당패가 별도로 존재한 단체였는지, 같은 단체 구성원 중 남녀를 부르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당패에 대한 구체적인 조선시대 기록이 희박한 가운데, 사당패 또는 남사당패들을 직접 목격한 세대들인 초기 민속학자들이 조사한 여러 기록에 각각 다르게 표현된 점을 보면 이들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당패라고 하더라도 거사들이 항상 같이 다녔고, 남사당패에도 어름산이 등 일부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당패나 남사당패 공히 남녀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심우성은 남사당패 출신 최성구의 말을 인용하여 남사당은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나, 남사당 말기에는 간혹 어름산이나, 그밖에 한 두 사람의 여자가 낀 적도 있었다고 하여, 남사당패에도 여자들이 일부 있었음을 말하였다.

김재철은 사당패 중에서도 여사당은 곡예, 가창 및 무용을 한다고 하였고,송석하는 사당들이 가면극, 인형극, 속요, 무용, 곡예를 한다고 하였다. 송석하가 말하는 사당이 남사당패 내에서의 여자인 사당을 말하는지 이전의 사당패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여자는 매춘을 하고 남자는 계간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녀가 같이 공연을 하는 남사당패 내에서의 여사당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초기의 남사당은 남녀가 같이 공연을 하며 남자를 남사당, 여자를 여사당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수백 년 간 내려온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의 전환이 아무리 급격히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사의 입장에서 평생을 같이 공연을 다니던 사당들을 단시간에 내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당들이 사회에 나가서 정착할 만한 시간을 주고, 그들이 조직에서 완전히 퇴출될 때 까지는 같이 공연을 다녔을 것이므로 초기 남사당패는 여전히 남녀사당이 같이 움직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로 인하여 사당패 일 때 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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