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다지기 선소리와 바우덕이 Ⅰ
지경다지기 선소리와 바우덕이 Ⅰ
  • 시사안성
  • 승인 2018.11.13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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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15
1980년대 남사당 풍물놀이
1980년대 남사당 풍물놀이

사당패들은 선소리(立唱) 산타령류의 잡가를 주로 불렀으나, 사당패의 본거지인 안성 청룡리에서는 꼭두쇠인 바우덕이가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하였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일반적으로 지경다지기와 같은 노동요는 유랑예인이 부르는 성격의 노래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랑예인들은 말 그대로 전국을 무대로 옮겨 다녀야 하므로, 전국 어느 집에서 가옥을 신축하여 지경다지기 소리를 필요로 할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그 지역의 소리꾼들이 상여소리와 지경다지기 소리를 도맡아 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청룡리에서는 유랑예인, 그 중에서도 여성인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 시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 의문을 풀고자 2009년도에 청룡리에서 현지조사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9년 당시 80, )

 

, 겨울 되면 들어와서 먹을 게 없으니깐 청룡사에 가서 얻어 먹는겨. 겨울을 나고 이제 정월 밤만 넘으면 고사반부터 시작하니까 정월이면 나간대요. 나가 벌어서 또 절에 시주도 하고. 얻어먹었으니께.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대원군께서 경복궁을 지을 적에 각 남사당을 다 초대를 했대요. 그래서 거기 청룡남사당도 부름을 받고 갔는데, 그 얼마나 줄도 잘 타고 춤도 잘 추고 선소리도 잘 먹이던지. 지경 닿는데 돌로다가 끈을 매가지고 어기영차하고 지경이야하면서 쿵쿵 다지거든요. 그거 다지는데 얼마나 구슬픈 가락으로 노래를 잘 부르고 그랬던지, 대원군께서, 아주 일등을 했어!! 우리 청룡남사당이. 대원군께서 벼슬을 하사하시고 풍악놀이 기구 일절을 다 하사하셨대요.

 

**(2009년 당시 77, ), **(2009년 당시 68, )

경복궁, 그거 터 닦는데 선소리 먹일 사람이 없어 가지고서 아무리 궁터를 닦아도 저기하니깐 임금님이 그거 선소리 먹이는 사람 어디 없냐고 그러니깐. 저기 경기도 안성에 불당리라는데 바우덕이가 살고 있다고 그랬디야. 그래서 바우덕이가 살고 있다고. 그래서 저기 남사당패라고. 그땐 남사당이라고 그랬지. 지금은 사물놀이라고 그러죠. 남사당에 선소리 잘 먹이고 여자가 있다고 그랬대. 그러니까 그럼 가서 불러오라고, 그래서 데려다가 거기서 선소리를 먹이는데 그렇게 잘하더래. 아주 뭐 그냥.

 

 

**(2009년 당시 77, )

그전에 인저 바우덕이란 사람이 뭐여 저저, 경복궁 터를 다질 때 바우덕이란 사람이 선소리를 먹였단 얘기지.

 

**(2009년 당시 71, )

경복궁 집 지을 적에 그 사람이 선소리 냈다는 거여. 그래서 옥관자라고 해서 타왔다는데, 청룡에서 그걸 잘 간수만 했으면...

 

이상과 같이 청룡리 주민들의 공통적인 구술은 대개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 시 경복궁 터를 다지기 위한 지경다지기를 할 때 선소리를 하였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훌륭하여 대원군으로부터 공으로 옥관자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1865년 경복궁 중건 시 각종 놀이패들을 불러다 공연을 하였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기완별록 등 각종 문헌이나 경복궁 영건가와 같은 민요를 통하여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사당패들이 참가하여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하였다는 연구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사당패들은 판염불의 일종인 산타령이나 잡가를 주로 하고, 노동요인 지경다지기 소리를 하였다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요는 그 특성상 정착민들이 부르는 노래이지, 노동을 하지 않는 유랑예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청룡리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룡리에서는 왜 바우덕이가 남사당놀이를 잘 했다는 이야기 보다 선소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이유는 다음 자료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2007년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 바우덕이 추모제
2007년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 바우덕이 추모제

 

옛날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길 삼각산 제일봉에 봉황이 넌짓 않았구나~~. 봉의 등에 터를 닦고 학의 나래에 집을 지으니. 둥구재, 만리재는 청룡이요. 왕십리, 락산은 백호로다. 수지조종한강수(水之 朝宗漢江水)는 금대(襟帶)같이 둘러 있고-산지명산(山之名山) 관악산은 안계(眼界)가 좋을시고. 종남산(終南山)은 전위대요. 북악산은 후위대라. 인왕산이 우익되고. 맹현(孟峴)이 좌익되어. 만호 장안 억만구(萬戶長安億萬口)를 내리 굽어 살펴보니 천하무비 금성탕지(天下無比金城湯池). 억만세지 웅도(億萬歲之雄都)로다.(이하 생략)

이 노래도 어느덧 벌써 옛시조(古調)가 되어 서울과 같은 도회지에서는 별로 들어볼 수가 없고 다만 향촌벽읍에 아직까지 남아있어서 촌로가동의 여흥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노래는 당시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공사에 복역하는 일반관리와 역부를 위안고무하기 위하야 예()의 영웅적 기풍으로 천하의 가기무동(歌妓舞童)을 크게 모집하여 삼삼 오오로 대()를 편성하고 공사장에 가입하여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민간에서 가옥을 건축하려고 지경을 닦을 때에 발을 맞추고 괴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장구나 북을 치며 잉여라--하고 가지각색의 소리를 받고 채기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2710별건곤 3호의 자료에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지경다지기를 할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고 신명을 돋우기 위하여 삼각산 제일봉에 봉황이 넌짓 앉았구~~’로 시작하는 내용의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보급하였다고 한다.

1865~1868년 사이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하여 낡고 허물어진 경복궁을 중건 하였는데, 당시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으나 대원군은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였다. 목재, 석재 등 건축자재 확보에서부터 공사비 충당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으나 공사를 강행한 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여 공사비를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단위 화폐의 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국가재정의 타격을 주어 민심이반으로 인한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정세에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삼각산 제일봉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보급하게 된 것이다. ‘천하의 가기무동을 크게 모집하여 삼삼오오로 대를 편성하고 공사장에 가입하야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는 구절로 보아, 이 노래는 전국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대대적으로 선발하여 특정의도를 가지고 보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도 그렇지만 궁궐에서도 건축물 축조 시 터를 다질 때 지경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원군은 건물 터를 다지는 이 기회에 경복궁 지경소리를 보급하여 노역자들의 노고도 덜어주고, 경복궁 중건의 당위성도 주장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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