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안성 성당 이야기
(기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안성 성당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11.0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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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안법학교 총동문회 직전 부회장을 역임했고, 안성문화원 사무국장을 역임한 임상철 전 부회장이 안성 성당과 안법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왔다.
임상철 전 부회장은 안법학교 졸업생일뿐만 아니라 성당옆에 60여년을 살면서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살고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구슬프게!

누군가에겐 추억의 소리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면서 은은히 퍼져나가는 성당의 종소리...

 

어느 날 우연히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뜬금없이 아무런 연관도 없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미국의 작가 E.헤밍웨이(1899~1961)1940년 발표된 장편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소설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내용처럼 안성성당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정의와 자유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그 제목이 문득 떠오른 이유는 워낙 유명한 소설이어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종소리가 들리는 성당 옆에 살고 있고 성당 주위를 떠나 살아 본적이 없으니 60년을 듣고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성당이나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고을이 전국에 몇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성성당의 종소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62년째 울리고 있다. 그 긴 세월을 종소리와 함께 안성의 근현대 역사가 살아있는 안성성당과 안법학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안법학교 졸업생으로 안법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 이사, 감사, 부회장을 거치는 30년 동안 관심과 성의가 없어서인지 안성성당과 안법학교에 관련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주 자세히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디에서도 정리된 글을 읽어본 적도 없다. 이 글을 통해 안성성당과 안법학교와 관련된 사건의 내용과 정확한 연도와 날짜 등을 안성 천주교의 태동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당시 사실과 상황을 취합하고 모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안성 천주교의 시작과 안법학교

1970년대 안법학교 전경(왼쪽 건물은 1959년 완공한 강당)

 

안성 천주교사를 이야기하려면 나의 모교인 안법학교를 분리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천주교 수원교구 산하 학교법인 광암학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안성시 구포동에 소재하는 안법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에 꼬마 중학생으로 입학하여 청년으로 훌쩍 자란 1977년까지 6년간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교 특성상 매주 수요일에는 안성 관내에서는 하나 밖에 없었던 제일 큰 강당에서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참석하여 합동미사를 올렸다. 교실 창문 너머 운동장 끝에 자리 잡은 아주 멋스러운 성당은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친구들과 수다 떨며 장난치던 추억이 깃든 장소 이기도하다.

요즘도 가끔 성당 계단에 앉아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옛날 일들을 생각하며 성당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멋진 성당은 유럽의 어느 유명한 성당들보다도 내겐 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성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법학교는 19091월 프랑스 선교사인 공안국(孔安國, Gombert Antonio)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01019일 천주교 안성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사목 활동과 함께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학교를 설립한 뒤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안성의 지명 첫 글자인 자와 설립자의 국적인 법국(프랑스)자를 머리글자로 따서 안법으로 교명을 지었다.

1927년 6월 19일 "동아일보" 사회면(3면)

1912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학생을 모집하여 여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7619일자 동아일보사회면 기사에는 宗敎超越 순조선식으로 가르처 安城安法學校 孔安國氏라고 소개하면서 사회사업 공로표창 시상 소식도 함께 보도되었다.

안성성당은 2000103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 하였으며, 안법학교는 2009530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2017년 현재 65(고등학교 기준) 16,200명을 배출한 경기도 명문 고등학교로 성장하였다.

 

영원한 한국인 공안국 신부님의 생애

설립자 공안국 신부

 

공안국 신부님에 대한 자료는 많지만 여기에서는 60년대 시각으로 가톨릭靑年 19권 제7(19657) 안성천주교회사에 수록된 공신부님의 약력을 그대로 소개하겠다.

 

공신부님의 원명은 안도니오 아곰벨드(한국말로는 孔安國이라 지었다). 一八七五년 불란서 아브에른 현에서 탄생하셨다. 남매중 남으로 출생하고 형제가 신부가 되고 자매가 수녀가 되었다. 형님은 예수회 신부로서 인도에 와서 전교하셨다. 남인 안도니오는 어려서부터 외교지방에 주의 복음을 전할 열성이 간절하여 동생과 같이 신학교 가기를 의론하고 부친께 승낙을 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아마 시험한 모양이다. 그래서 동생과 둘이 밤에 창문을 뛰어 넘어 신학교로 갔다. 이러한 열성으로 공부하여 마침내 一九○○二十七일 신품을 받으셧다. 동생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임명되어 전도의 양양한 희망을 품고 한국을 향하여 떠났다.(중략)”

청년시절 동생(줄리앙) 신부와 함께
청년시절 동생(줄리앙) 신부와 함께

 

우리의 슬픈 역사는 공안국 신부님 형제분들께도 하나님의 보살핌은 미치지 못하였다. 스물여섯 새파란 청춘에 이 땅에 오셔서 백발이 성성한 76세의 노인이 되어 발발한 6.25 한국 전쟁 중이던 1950715일 인천의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원에서 동생분과 함께 인민군에 납치되어, 같은 해 1112일 공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바로 다음날인 1113일 동생분도 북한 중강진 허허 벌판에 두 분 모두 외로이 묻히셨다. 1965년 가톨릭靑年 19권 제10호에 수록 된 그 애통한 심정을 표현한 당시 추도사 일부를 소개하겠다.

 

! 신부님이 지으신 벽돌집이 여기 있고 신부님이 기르신 수천의 양들이 여기 있지만, 못 보시고 만리타향 후미진 곳에서 八十노령의 쇠약한 몸으로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냉방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 원통하고 비통하고 설어운 마음 가슴이 터지는 듯 오장이 메어지는 듯 아! 땅을 치고 통곡하면 시원할까. 가슴을 치면 시원할까. 몸부림을 치고 머리를 드리 받으면 시원할까. 애끊는 마음 진정치 못하겠나이다. !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 보옵나니...”

 

공안국 신부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당시 가톨릭청년에 소개된 약력과 추도사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는듯하다.

 

안성 천주교의 주춧돌을 놓다

 

안성본당의 초대 신부로 부임한 공안국 신부는 통진 군수를 지낸 백()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삼았다. 1920년 공신부님이 신품 받은지 20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 손으로 성당을 짓자는 의견이 나와 각 공소의 신자 대표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즉시 자금 모집을 하였다. 당시 황소 한 마리 값이 팔십 원이었는데 제일 많이 성금을 낸 신자는 삼백 원까지 냈다.

1922년 박호연(朴浩淵, 야고보), 윤관병(尹觀炳, 베드로), 김중목(마르코) 이 세분은 가사는 전폐하고 성당 짓는 일에 총참모 격으로 모든 일을 지휘하며 본당과 공소의 모든 교우들의 소망인 성당신축에 열성과 정성으로 이끌어 나갔다.

보개면 동안강당을 일천십 원에 사들여 기와와 돌을 사용하고, 기둥과 대들보는 압록강 재목을, 일반 재목은 서산에서 구입하여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접목하여 완공한 안성성당은 초기 토착화된 성당 건축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푸아넬(Poisnel V. 한국명 위돌박)신부가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내부는 한식으로 외부는 실리카 양식을 절충한 형태의 2층으로 된 40(건평 80)의 성당을 완공하여 성모승천첨례날인 815일 첫 미사를 드리고 축성하였다.

1929. 7. 1 안법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 종각을 증축하기전 동안강당 자재로 완공한 모습
1929. 7. 1 안법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 종각을 증축하기전 동안강당 자재로 완공한 모습

 

현재의 종탑부는 1955년 기존 성당 건물에 입구 종각(*필자주 : 현재는 종탑이라고 부르는데 1960년대 자료를 보면 종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이 글에서도 종각으로 통일해 사용하였다) 부문만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로 증축하였다.

안법학교는 1950년 봄부터 2층의 교실 신축을 시작하여 일층 건물을 공사하던 중 6.25 동란으로 중지되었고 그해 76일 학교와 성당은 인민군에 점령당하고 모든 건축 자재는 분실하고 말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927일 안성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928일 서울을 탈환하였는데 그날을 9.28 수복이라 부른다.

전쟁이 끝나고 1953323일 재부임한 요셉 임세빈 신부님의 노력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던 안법학교는 195410262층의 붉은 벽돌 교실(258)을 총 공사비 560만환(당시 쌀 한말에 삼백환~사백환)(*필자 주 : 당시 쌀 한말 가격을 350환으로 책정한 후, 현시세로 환산하면 32,000만원 {16,000×20,000(쌀 한말 8)}으로 예상된다) 들여 완공했다.

안법학교 공사를 마친 임신부님은 기존 성당을 지을 때부터 벼르던 종각 신축을 위한 자금을 거출하였다. 하지만 종각 신축을 위해 거출한 쌀값이 폭락하고(공사 중 한말에 삼백환에서 천환까지 올랐다)물가는 올라 공사를 중단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안법학교 신축교사 벽돌을 나르는 재학생 모습
안법학교 신축교사 벽돌을 나르는 재학생 모습

 

우여곡절 끝에 1955815일 안법학교 교실 건축에 사용된 동일한 벽돌로 된 백척에 이르는 종각이 완성되었다. 공사비는 사십만환 예산의 5배인 이백만환으로 증가했다. 당시 교실과 종각 신축 공사는 전국 교회 중에서도 대규모 공사로 힘들고 어려운 공사였다. 공사로 인한 근심과 걱정으로 임신부님은 공사기간 동안 세 번이나 졸도 하셨다고 한다.

안법학교 옛 본관 건물은 건물 안전진단 결과 1995716일 안전성의 문제로 철거되었고, 안성성당은 19856월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안성성당의 종소리

 

안성본당에 1915년경 까지는 종이 없었다. 시계도 귀하던 시절 교회 종은 고을 사람들에게 미사시간과 함께 시간을 알려주던 고마운 소리였다. 당시 서울 사는 고경운씨가 안성성당에 다니러왔다가 사정 이야기를 듣고 종을 사 보내 주었다,

그는 안성과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안성사람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 번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시간을 알려주는 은혜를 주었다. 그 종소리는 1941128일까지 계속해 울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말 대동아 전쟁으로 집집마다 숟가락까지 걷어가던 시절 일본 경찰이 헌납을 요구하며 강제로 빼앗아 가면서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안성성당 종각 낙성기념(1955.08.15)
안성성당 종각 낙성기념(1955.08.15)

 

1955년 종각을 신축하고 최고의 좋은 종을 달기 위해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제10대 교구장이신 노기남(바오로) 대주교님께 간곡히 특별한 부탁을 드렸다. 1956년 노기남 대주교님이 유럽을 방문하시는 길에 독일에서 직경 3(1m), 무게 0.5t 되는 종을 구해 주셨다.

이 종은 고경운씨의 종이 멈춘 128일을 기념하여 1956년 같은 달 같은 날인 성모무염시태 첨례날 첫 종소리를 시작으로 멈추었던 종소리는 2018년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매일 울려 퍼지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울려 퍼지던 교회의 종소리는 잊혀지고 있다. 성당의 종소리를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까? 안성성당의 종소리는 65년째 안성 읍내에 울려 퍼지고 있다.

안법학교 옛 본관건물
안법학교 옛 본관건물

 

도시의 소음공해와 생활 속 층간소음으로 시달리다보니 종소리마저 소음으로 생각하고 청와대 신문고에 소음해결 민원이 접수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 네이버 지식in교회 종을 못 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하는 질문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답변은 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던지 그 교회에 다니라는 재미있는 답변도 있었다.

종소리를 귀로만 듣고 있으면 소음으로 들리겠지만 가슴으로 듣는 사람들의 종소리는 따듯하고 포근한 성스러운 깨우침을 주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연로하신 교우 분들이나 안성성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셨던 이정운 신부님과 같은 분들을 찾아뵙고 더욱 많은 이야기와 자료를 수집하지 못한 것과, 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평생 동안 종을 치며 살다 고인이 되신 히지노(세례명)님과 같은 안성성당 종지기 이야기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숙제로 남기고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느니.

- 존 던, 기도문 중에서 -

 

임상철(전 안법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참고 문헌 / 참고 사이트

 

- 윤정중, 안성천주교회사, 가톨릭靑年 19(7~11), 1965.

- www.anbeop.hs.kr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 http://news.donga.com/Pdf 동아일보 지면보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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