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꿈꾸던 오재영(吳在泳)
대통령을 꿈꾸던 오재영(吳在泳)
  • 시사안성
  • 승인 2018.10.3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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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8
오재영(국회의원시절 모습)
오재영(국회의원시절 모습)

오재영(1919~ 1973, 정무공 10세손)은 덕봉리에서 오학선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정규 교육 학력은 단지 초등학교 4학년 중퇴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기억력이 좋아 지나가다 한 번 인사를 나눈 사람은 후일 만나

도 그 성명을 기억하여 놀라게 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던 것 같다.

그가 3,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많은 선거를 치루는 과정에서 그의 놀라운 기억력은 선거구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가 덕봉리를 떠난 것은 채 20세도 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증언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 뒤 쇠꼴에 나무하러 갔다가 지개를 팽개치고 그 길로 서울로 갔다고 하니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서울에 올라간 그는 아는 집 이곳 저곳을 떠돌다 일본인 집에서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혼란기에 그는 종로에 나와 다니다가 관상가 백운학(처남)의 소개로 이시영(후에 부통령)의 손자를 알게 되고 그 인연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종로에서 출마한 이규창(이시영의 아들)을 만나고, 드디어는 이시영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정치에 눈을 뜨게 되고 이시영이 부통령이 되자 그의 정치에 대한 열정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그의 그러한 정치적 야망을 한갓 허풍이라 여기고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시영 부통령이 1949년에 경주이씨 일가들이 모여 사는 정자말(안성군 양성면 삼암리)을 방문한다. 이때 그가 부통령의 수행비서로 여기에 왔다. 주위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오재영이 부통령 비서래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무작정 서울로 간 그가 부통령의 비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그들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 덕봉리에 전해졌다.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하자 그는 안성에 내려왔다. 국회의원에 입후보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또 허풍을 떤다고 핀잔을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입후보했다. 무려 16명이 입후보하여 이교선이 9,767표로 당선, 오재영은 800표 득표에 그쳤다.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928수복 후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하면서 정부는 청년들을 제2국민병으로 편성해 모두 남쪽으로 피난시켰다.

오재영은 이시영 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대구로 피난갔다. 2국민병으로 남쪽에 내려간 청년들은 정부의 관리 소홀로 모두 대구부산 등지에 흩어져 유리걸식하며 개별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오재영은 대구에서 안성장정위안소를 차리고 안성사람이라면 누구나 와서 먹고 자고 갈 수 있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려 죽 한 사발이라도 얻어먹고 가면서 국회의원은 뭘 하는 거냐? 오재영이도 이렇게 안성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데하며 한마디씩 하고 고마워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그는 또다시 입후보했다. 선거 자금도 없어 선거 벽보를 인쇄하지 못하고 신문지에 오재영이라 써서 선전 벽보를 붙였다. 그러나 2대 때와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못했다. 오재영은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다닌 무식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무식한 영웅은 있으나, 유식한 영웅은 없다”, “유식한 사람을 국회의원 시키려면 선거를 할 이유가 없다. 대학교수를 데려다 국회의원 시키면 된다고 하면서 그는 구수한언변으로 농민들에 다가가 국회의원이란 국민을 밥 잘 먹게 하고 잠 잘 자도록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에 농민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구 안성장정위안소에서 죽을 얻어먹고 무사히 귀향했다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선거운동 봉사를 하기시작하자 여론이 비등하며 각처에서 오재영’, ‘오재영을 연호하는 여론이 퍼지더니 드디어 그는 12,689표로 장관, 변호사, 의사 등 쟁쟁한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국방분과위원으로 안성 출신 군인들에게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고 여당의 잇점도 살려 4대 국회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419 후에 실시된 5대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추풍회를 조직하여 당수로 입후보 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그는 6대 국회의원 선거(1963. 11. 26)이전에 5대 대통령선거(1963. 10. 15)추풍회를 조직하여 입후보했으나 408,664표를 득표해 3위를 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는 변영태(전직 외무부장관)를 누르고 동메달을 땄다고 자랑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6대 대통령 선거(1967. 5. 3)에 재도전 했으나 264,533표를 얻어 역시 3등으로 낙선하고 점차 건강이 악화돼(당뇨) 결국은 실명까지 하며 답답하게 지내다가 1973

54(실제로는 48)에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면하였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보잘 것 없는 학력으로도 2번씩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대통령에 입후보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둑한 배짱과 언변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과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독특한 친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높은 꿈, 원대한 이상은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으니 그의 이상은 완전허망했다고 할 수 만은 없다. 비록 대통령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은 장하다고 하겠다. 이상은 높게, 꿈은 찬란히, 도전은 과감히 하라는 교훈을 남긴 채 그의 일생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끝났다.

 

참고문헌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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