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안회(高安會)와 시국강연회(1)
고안회(高安會)와 시국강연회(1)
  • 시사안성
  • 승인 2018.10.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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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21
(조동필교수와 고안회(고대교우회 역사기록관 기증), 1960년 7월 동기 신입생 4명과 안성출신 조동필교수(경제학)와 2, 3, 4학년 선배들과 함께 고대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이 날 모인 고안회 회원은 20명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5번째가 조동필 교수이고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다
(조동필교수와 고안회(고대교우회 역사기록관 기증), 1960년 7월 동기 신입생 4명과 안성출신 조동필교수(경제학)와 2, 3, 4학년 선배들과 함께 고대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이 날 모인 고안회 회원은 20명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5번째가 조동필 교수이고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다

고안회(高安會)’는 고려대학교 안성학우회의 줄임말이다. 안성 촌놈이 그 넓고 복잡한 서울에 올라와서 많이 외로웠는데 입학하자마자 환영회를 해 준다고 안성 출신 선배들이 연락을 해 와서 많이 반가웠다. 캠퍼스에서는 개인 연락을 취하기도 하지만 주로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학교 게시판에 조금 큰 글자로 안성 촌놈들 모여라!” ‘몇 월 며칠 몇 시, 인촌 동상 앞에서’(밑줄 긋고)라고 써 붙여 놓아 처음에는 촌놈이라고 해서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신기하기도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공고문은 걸어가다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에 확 띄었다.

필자가 법과대학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고3 담임선생님의 진학지도 때문이었다. 물론 담임선생님은 학생이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3년간의 생활기록부 기록을 꼼꼼하게 분석한 결과였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도 하다. 생활기록부 기재 란에 있는 학생의 희망과 적성, 그리고 IQ(지능지수)검사 결과와 그에 따른 행동발달 평가(자주성, 준법성, 정의감 등 10가지 항목)에 대하여 담임선생님들이 예리하게 지켜본 결과이다. 그리고 학교생활과 개인상담에서 나타난 학생의 정서적 경향과 판단의 경향을 주관적으로 기록한 사항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은 틀림없다.

(필자가 이글을 쓰면서 지금 생각나는 것은 수 십 년간 학급 담임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맡고 있는 학생들에 대하여 과연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진리 앞에 서 있는 구도적(求道的) 동반자로 그들을 대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또한 교무주임의 업무를 맡고 있을 당시, 같은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내 자녀들의 시험지를 검토하다가 유혹에 끌리지 않았는지에 대하여도 언론 보도와 겹쳐서 회상이 된다. 직장생활에서의 비밀엄수 의무는 공직윤리이기도 하지만 자연법상의 기본 양심에 관한 문제라고 본다)

고안회 신입생 환영회(고대교우회 역사기록관 기증),
1960년 11월 4일 신입생을 환영하는 뜻으로 본관건물(법과대학)앞에 세워진 설립자 인촌(仁村) 동상 앞에서 18명이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이해구(4학년, 고시합격자)선배이고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필자이다

고안회 회원 중에서 가장 먼저 도움을 준 사람은 안법고 출신 법학과 직속 선배 이찬구(당시 법학과 2학년/성남시 국회의원 역임) 안법(7)선배이다. 지금의 학교장 추천 수시모집에 해당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후배를 캠퍼스 잔디밭에 앉혀 놓고 내일 임하게 되는 구술고사에 대하여, 1년 전 경험을 토대로 한 사전지도 덕택으로 전문영어(당시는 원서 해독) 시험과 독일어 구술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면접에서는 안법고 출신으로 고대 법학과에 진학한 정진환(2) 박대식(4) 이찬구(7)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찬구 선배는 2학년을 마치고 산에 들어가 고시공부 대신 두문불출 2년 동안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통일 3대 원칙과 정부의 ‘3단계 통일정책으로 선정된 <3단계 통일대책’(1970)> 역작을 출간한 적이 있다.

졸업 후 정부기관 국토통일원 연구원(교수)으로 들어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 연사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고(통일 강의 원본 CD는 필자에게도 보내주어 보관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인 통일위원회 활동은 당시 언론을 뜨겁게 달군 적도 있다.

고안회 출신 이찬구의 ‘생명사관’ 표지(네이버 블로그 서평)2014년 7월 14일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에서 호평으로 소개된 이찬구(고대 59학번)의 ‘생명사관’(2010, 지상사) 저서의 표지이다
고안회 출신 이찬구의 ‘생명사관’ 표지(네이버 블로그 서평)2014년 7월 14일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에서 호평으로 소개된 이찬구(고대 59학번)의 ‘생명사관’(2010, 지상사) 저서의 표지이다

세계 생명사관 연구회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생명사관’(生命史觀, 2010년 지상사)을 출간하여 이찬구의 생명사관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 역사관으로서 과학과 철학과 종교를 통합하고, 통섭하여 도출한 새로운 역사관이라는 서평을 받은바 있다(네이버 블로그, 2014. 7.24).

201111월에는 비화’(秘話, 출판사 상상나무)를 출간하면서 서문에 저자가 신()앞에서 쓰는 최후의 진술서이자 눈물의 고백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저자는 초고를 필자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어 목차 검토와 본문 교정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 바람에 세상에 이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말인가?” 감추어진 시국에 대하여 갸우뚱할 기회를 가졌다).

1960년 법학과 1학년 때에는 캠퍼스 안에서 두 번에 걸쳐서 고안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7월에는 안성 출신 조동필 교수와 함께 고안회 모임을 가진바 있다(사진 참조). 당시 고려대학에는 안성 출신 교수님이 두 분 있었다. 당시 정경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조동필(안성 미양면 출신)교수와 법과대학 행정학과 교수인 윤세창(안성 고삼면 출신)교수이다. 당시 안성 출신 재학생들 36명으로 고안회를 결성하고 있었는데 두 분의 교수는 고문인 셈이다. 당일 20명이 모여 기념 촬영을 하였으며 서로 고향 이야기이며 각자 다른 전공에 대하여 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고안회원들은 대학에서 인기 있는 명 강의, 정경대학 조동필 교수의 경제학시간에 청강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같은 해 114일에는 지난번에 나오지 못한 회원 18명이 모여서 두 번째 신입생 환영회를 한 셈이다. 이날에는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인 존경하는 법학과 직속 이해구 선배(내무부 장관, 국회 3선의원, 두원공대 총장 역임)도 나와서 삶의 진실에 대하여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후배 신입생 환영하는 고안회(개인 소장),1962년 4월 필자 등 3학년 선배들이 새로 입학한 고향 후배 3명의 신입생을 환영하기 위하여 정경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후배 신입생 환영하는 고안회(개인 소장),1962년 4월 필자 등 3학년 선배들이 새로 입학한 고향 후배 3명의 신입생을 환영하기 위하여 정경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19623학년 때에는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서 고안회 모임을 가졌다. 신입생 때 환영회를 받았으니 이제 갚을 차례이다. 4월 초에는 새로 입학한 고향 후배 3명을 위한 신입생 환영식을 해주는 자리였고 511일에는 고안회 회원들이 모여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를 가졌다.

고안회 모임(개인 소장)1962년 5월 11일 고안회 회원들이 인촌 동상 앞에서 중앙도서관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고안회 모임(개인 소장), 1962년 5월 11일 고안회 회원들이 인촌 동상 앞에서 중앙도서관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필자는 4학년 때인 1963년에는 대학에서도 기고 활동을 비교적 활발하게 하였던 것으로 회상된다. 동년 6월 초에는 주간으로 발간되는 대학 신문인 고대신문’(345, 4면 논단)에 한자로 政黨社會的 性格-槪念側面的 考察하여-’라는 주제로 논단을 대학신문에 처녀 기고를 하였던 추억이 있다.

또한 고안회(高安會) 회장으로 선출된 기념으로 <飛雲> 창간호(160)를 발간하면서 조동필 교수의 노량진 사저를 찾아가 축사를 부탁하여 받아 싣기도 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창간사 비운(飛雲)을 내면서’(3p), 논단 정당과 대한민국 헌법’(44p), 지상 좌담회를 기획한 <회심(會心)의 정담(情談)-어제, 오늘, 내일의 전당(殿堂)>(77p)을 주관하여 진행한 적이 있다. 기타 지면은 회원들의 원고와 안성 유지들의 인생이야기를 받아 구성하였다. 그리고 좌담회의 진행 사항은 전부 녹음으로 기록하여 역시 창간호에 게재한 바 있다.

그 당시에는 서울 소재 각 대학교 마다 조직되어 있는 안성 출신 학우회를 연합한 비봉학우회(飛鳳學友會)를 설립하여 안성과 서울에서 활발한 대학생들의 활동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秋水 김태영(金台榮)선생(언론인, 교육자)이 고문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안성 출신 대학생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안성 소재 언론인 협회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이 된다. 학우회 연합회 가운데에서도 고려대학교 안성학우회가 단독으로 飛雲’(비봉산의 꿈=구름) 창간호를 발간하여 부러움을 독차지 하였던 추억이 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첫 번째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안회는 안성 출신 교수들의 도움으로 고대 총장 유진오(兪鎭午) 박사를 안성으로 초청하여 시국 대 강연회를 구상하게 된다.(다음 호에 계속)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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