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4.1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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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성 유기의 역사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안성유기는 안성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안성장이 위축으로 안성경제가 어렵던 시절인 일제강점기 동아일보(1931211) 안성지역특별판에는 안성유기의 쇠퇴는 안성의 쇠퇴라고 하였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안성유기의 발전은 안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시사안성을 통해 안성의 가장 유명한 산업인 안성유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연재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필자가 2012년 집필한 안성지지의 내용을 신문형식에 맞추어 새롭게 보완, 편집한 내용이다.

필자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필자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안성 유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체에 대해서도 유기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시작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없다.

그런데 안성 유기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것은 죽산의 장명사지 탑지석이다.

장명사지는 관음당이라고 하는 옛날 절터를 말하는데 죽산면의 연세의원 앞 개인집 마당에 있으며, 이곳에는 현재 파손된 거대한 좌불상이 남아 있다.

장명사지 석불좌상
장명사지 석불좌상

안성시에서는 이곳 장명사지의 중요성을 알고 2017년에 토지를 매입하고 올해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앞으로 주변 땅을 더 사들이고 발굴을 몇 차례 더 해야만 이 사찰에 대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1972년 이곳에 있던 탑에서 나온 탑지석과 청동원형사리함으로 인하여 장명사지임이 밝혀졌다. 이곳에서 나온 탑지석은 현전하는 고려 시대 탑지석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탑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명사지에서 나온 탑지석
장명사지에서 나온 탑지석

 

統和十五年四月二十七日國泰人

安願以長命寺五層石塔造立香

徒姓名女後○○○○○○○○

棟梁大行明係佳校慰戶長安帝京金正崔

○○博士禮靈○○○金位等

料色光師玄肯 鍮匠 只未知

 

통화 15(997) 427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염원하면서 장명사 오층석탑을 세웠다.

향도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

동량 대행명도교위 호장 안제경, 김정,

요색광사 현긍 유장 지미지

장명사지에서 나온 청동원형사리함
장명사지에서 나온 청동원형사리함

 

로 표기된 것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체 문구를 해독할 수는 없으나 마지막의 유장 지미지라는 글자는 명확히 보인다.

이 탑지석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초기인 997년에 이미 안성 죽산 지역에 유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유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유장이 당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함께 출토된 청동원형사리함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종과 같은 사찰에서 사용하는 불구류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안성 유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지미지라는 한자 이름을 번역하면 다만 알지 못한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씨 중 다만 지()’라는 성씨는 없다.

따라서 지미지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기장이 탑을 제작하는데 참여를 했으나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지미지라고 이름을 지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1614년 택당(澤堂) 이식(李植) 선생이 천장과 관련하여 전라도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오면서 안성의 유점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안성에서는 이미 유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 제작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점이 안성의 어디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택당 이식 선생의 "택당집"
택당 이식 선생의 "택당집"

 

조선 후기에는 중앙 관청에서도 안성 유기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안성 유기장을 징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의궤(儀軌)"에 잘 나타난다.

의궤는 조선 시대 왕실과 국가의 행사가 끝난 뒤에 논의, 준비 과정, 의식 절차, 진행, 행사, 논상 등을 기록한 책이다.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안성에 뛰어난 유기장이 많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김태강, 김가노미 등 구체적인 장인의 이름까지 나온다.

김가노미도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정확한 이름을 모르자 김가 놈이라고 하대시하여 부르던 별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가례도감의궤
가례도감의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헌왕후의 장례식을 정리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에도 안성 유기장의 이름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18세기 중반에 이미 안성의 유장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불려갈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볼 수 있다.

국장도감의궤

 

안성공원에는 많은 비석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중에는 1841(헌종 7) 안성군수를 지낸 정만교의 선정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갓점, 연죽점, 숟가락점, 야점, 목수점 등 10여 종의 수공업자 명단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유점(鍮店)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당시 안성에서는 군수의 불망비를 세워줄 정도로 수공업자들의 영향력이 강세였었고 그중 유기점도 강성했었다고 볼 수 있다(계속)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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