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에 철갑상어 양식기술 전수한 “민족의 자랑” 박대희 사장 - 시사안성이 만난 사람들 - (1)
북측에 철갑상어 양식기술 전수한 “민족의 자랑” 박대희 사장 - 시사안성이 만난 사람들 - (1)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10.21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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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가르침 잊지 않고 실천하려 노력
젊어서는 안성의료사협 씨앗을 심고 가꾸기도
지난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대동강 수산물 식당 찾아 감회 새로워
9월 18일 대동강 수산물 시장을 찾아 수조 속 철갑상어를 구경하는 문재인대통령 내외

약 한달전인 지난 9월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918일 평양 대동강 수산물 시장을 찾아 수조 속 철갑상어를 구경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많은 화제가 되었을 때 알 만한 사람들은 박대희사장을 떠올렸다.

박대희 사장이야 말로 북측에 철갑상어 양식기술을 전수해 평양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메뉴 중 하나인 철갑상어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안성에서 박대희 사장을 아는 사람들의 감회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도 그걸 것이 박대희 사장은 약 600년간 조상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고삼면 가유리가 고향으로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안성에서 살고 있는 말 그대로의 안성사람이다.

여기에 더해 전국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삼면 가유리에 있는 자신이 소유한 철갑상어를 키우는 수조 앞에선 박대희 사장
고삼면 가유리에 있는 자신이 소유한 철갑상어를 키우는 수조 앞에선 박대희 사장

 

600년을 고삼면에서 대대로 살아온 안성 토박이

박대희 사장(1955년생)의 삶은 파란만장하다기 보다 항상 최선을 다하며 창의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삶이라 할 수 있다.

박대희 사장은 밀양박씨 귀종공파로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 박주헌씨와 어머니 김임숙씨 사이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박대희 사장의 집안은 충북 음성에서 이주해 와 고삼면 가유리에서 600여년을 거주한 말 그대로 토박이 안성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대희 사장의 할아버지가 조실부모해 집안형편은 어려웠다. 박대희 사장의 어머니가 시집왔을 때 집안형편은 때꺼리조차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밥해먹을 솥단지하나 없을 만큼 어려웠다.

그런 집안을 부모님이 지독하게해서 살림이 어느 정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지긋지긋한 가난과 힘든 농사일을 대물림하기 싫었던 박대희 사장의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박대희 사장을 공부시켜 안청중학교에 이어 인문계 안법고등학교로 박대희 사장을 진학시켰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박대희 사장은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돈 벌러도시로 나갈 때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에 남았다. 물론 부모님은 한사코 말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본지와 인터뷰하는 박대희 사장
본지와 인터뷰하는 박대희 사장

농민의 아들, 청년 박대희의 꿈 농민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장가를 잘 들다

농민의 아들, 청년 박대희에게는 꿈이 있었다. 농민들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하고 농사를 지어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농촌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마을 이장을 도맡아 하다시피한 어버지와 덩달아 부녀회장을 한 어머니의 삶을 곁에서 보면서 농민이 얼마나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하는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한마디 못하는지,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농사일을 배울 수 없어 주먹구구식일때가 많다는 것을 잘 아는 박대희 사장이었기에 그런 농촌현실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공무원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공무원이라도 집에 오면 없는 살림에 대접해야 하고, 당시에는 농사도 주먹구구식 일때가 많았는데 그게 화가 나고 싫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어 당시 YMCA가 의정부에서 진행하는 45일간의 농촌지도자 교육에 참여해 교육을 받고 눈이 뜨였.

농사와 관련된 법과 제도를 배우니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부당함의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 부당함을 해결할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취직자리도 알선해줬지만, 마다하고 목장으로 품팔러 다니며 농사를 배웠다. 1365일중 275일을 일을 다녀 그 품삯으로 송아지 두 마리를 사서 소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사코 반대하던 부모님도 결혼하면 농사짓게 해 주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해서 선을 보고 박대희씨로 하여금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장가 잘 간 사람이라고 자부하게 만든 부인(1956년생)을 만나 결혼을 했다.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주말진료를 왔던 권성실 의료사협 원장과 마을 청년으로 일했던 박대희 사장이 오랜만에 만났다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주말진료를 왔던 권성실 의료사협 원장과 마을 청년으로 일했던 박대희 사장이 오랜만에 만났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하며 농민권익에 앞장서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해 신뢰를 얻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4H에 참여하고 청년회를 만들고, 가톨릭 농민회 활동에 참여했다. 화전을 일궈 기금을 마련하고 서로 서로 품앗이로 농사일을 돕고 부당한 행정을 고치는데도 앞장섰다. 저항했다. 마을에서 7-8, 고삼면 전체에서 20-30명의 청년들이 움직였다

세금이 많다 싶으면 면사무소에 가서 따지니 세금이 줄었다. 농민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청년 박대희는 동네 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청년 박대희의 꿈과 더불어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 박대희의 노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으려면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 “말을 해도 듣기 좋은 말을 가려서 하고, 참을 인 세 번이면 죽음을 면한다” “다른 사람과 척지을 행동을 하지마라는 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자식들 공책 쓰다 남은 것을 모아 실로 꿰어 꼼꼼히 생활내력을 기록하고 근면성실 했던 어머니의 가르침은 그대로 박대희 사장의 생활신조였고, 그 신조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눈썰미 빠른 것도 물려받아 부모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밭 갈고 소먹이고 농사짓는 것도 배웠다.

내 소로 내 농사일을 먼저 하기보다 동네 사람들 일을 우선시했다. 동네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박대희 사장이 경영하는 두라영어조합 홈페이지 첫 화면
박대희 사장이 경영하는 두라영어조합 홈페이지 첫 화면

 

연세대학교 주말진료팀을 만나고

대한민국 최초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설립의 씨앗을 심고 가꿔

1987년 당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대학생들은 농촌일손을 돕기 위해 농촌봉사활동을 했었다.

1987년 연세대학교 의대생들이 청년 박대희가 살고 있는 고삼면 가유리로 주말진료를 왔다. 말하자면 의대생들의 농촌봉사활동이었던 셈이다.

1987년은 전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기 전이었던 시절이니(농어촌 의료보험은 1988, 전국민의료보험은 1989년시작) 더더욱이 농민들에게 병원은 멀기만 했고, 병원문턱은 높기만 했다.

그런곳에 연세대학교 의대생들이 무료로 진료를 온다니 환영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연세대 의대생들이 주말진료를 온다고 하자 박대희 농민등이 빈집을 수리해 불을 때서 주말진료할 장소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처음에는 박대희사장의 부인이 밥을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나중에 동네 주민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궁이에 밥을 때서 밥을 하고, 곤로에 찌개끓여 함께 밥을 먹으며 신뢰를 키운 고삼면 주민들과 연세대학교 의대생들의 인연은 1994424300여명의 조합원과 12,000만원의 출자금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현재 명칭은 안성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 이하 이글에서는 의료생협)을 탄생시켰다.

박대희 사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정말 올지 반신반의 했었다면서 사람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정작 의료생협이 출범한 후 박대희 농민은 의료생협활동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

두라영어조합 현판
두라영어조합 현판

 

생업으로 하던 역돔 양식정전으로 큰 손해

러시아 기술자로부터 철갑상어 양식기술 전수받아

핵심기술인 부화기술은 혼자서 터득

1986년경 당시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마산과 창녕지역에 내려갔다가 알게되어 박대희 농민은 물고기 양식에 관심을 갖고 1990년경부터는 틸라피아’(흔히 역돔이라고 부르는 민물고기)양식을 했는데, 정전이 되어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꾸리는 것이 시급했던 만큼 생계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경기도 가평의 연구소에 가서 미래 고부가가치 어종으로 철갑상어양식이 유망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철갑상어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철갑상어 양식은 국내에는 철갑상어 양식기술 특히 인공부화기술이 없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철갑상어 양식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렵 박대희 사장이 양식업을 하는 바로 인근에 철갑상어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대규모 양식장을 조성했고, 관리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대희 사장은 그 양식장을 관리하면서 철갑상어와 관련된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철갑상어 인공부화 기술을 가진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구소련이 붕괴되며 생긴 나라로 많은 기술자들이 생계를 위해 해외로 취업을 했는데, 고삼면 가유리 박대희 사장이 관리하는 양식장에 철갑상어 인공부화 기술을 가진 기술자가 취업을 온 것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기술자도 인공부화와 관련된 핵심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박대희 사장이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기술을 깨우쳤다고 한다. 국내최초였는데 박대희 사장의 기억으로는 2000년 경이었다.

박대희 사장은 경기도 민물고기 연구소(현재의 경기도해양수산자원연구소)와 협력해 연구소의 기술지도하에 철갑상어 인공부화에 성공했다고 당시 언론에 홍보되어 철갑상어 전문가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 시작했다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왼쪽)과 함께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왼쪽)과 함께

 

2008년 현대아산으로부터 연락받아 방북

아무 조건없이 인공부화기술 북측에 전수

인공부화 성공, 양식기술 전수하자 민족의 자랑이라고 칭찬
2008년 당시 대북사업을 하던 현대아산으로부터 북한에 양식기술을 전수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박대희 사장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고 싶다고 수락해 북한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철갑상어 양식을 통해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외화벌이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에서는 처음에 박대희 사장이 인공부화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러시아, 중국 등에 기술자를 보내 기술을 배우려 했지만 실패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대희 사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님의 가르침,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으려면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는 말대로 알을 밴 철갑상어 30마리(당시 시가 15,000만원 상당)를 아무 조건 없이 북한으로 가지고 들어가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처음에 북측에서는 알 밴 상어라는 말도 의심해 박대희 사장은 직접 개발한 검란기(삭대를 응용해 박대희 사장이 직접 개발한 철갑상어 알을 꺼내 볼 수 있는 기기)를 이용해 즉석에서 철갑상어 알을 보여줬다고 한다.

마침내 북한에서 철갑상어 인공부화에 성공하는 순간 북한 기술자와 관계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와 신뢰를 얻게 되었다.

북측의 철갑상어 양식 기술자들, 박대희 사장의 강의를 필기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10만평 규모에 275명의 기술자들이 상주하는 철갑상어 양식장에서 박대희 사장은 이후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북한의 기술자들에게 철갑상어 양식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박대희 사장은 당시 북한에서 있었던 여러 일화들을 이야기했는데 그 중 하나가 강의와 관련된 이야기다. 박대희 사장이 철갑상어 양식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일주일에 12시간씩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양식장의 최고 책임자부터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박대희 사장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데, 얼마나 집중하고 조용한지 파리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북한에서의 철갑상어 양식 기술 전수는 대성공이었고 그래서 북한의 기술자들과 고위층 관계자들은 박대희 사장의 노력에 감사하면서 박대희 사장에게 민족의 자랑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북에서 선물로 받은 양복을 입고 북한 기술자와 함께
북에서 선물로 받은 양복을 입고 북한 기술자와 함께

 

백두에서 한라까지통일염원 담은 회사 창립

북한 수산물 연간 300만불 수입해서 판매

20105.24조치로 한순간에 단절

북한에서는 박대희 사장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양복을 해주는가 하면, 박대희 사장에게 북한 수산물 무역권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두라영어조합법인인다. “두라의 의미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뜻을 품은 것이다.

두라영어조합법인은 2010년까지 연간 300만불 이상의 북한 수산물을 수입해 판매했으며, 직원은 16명까지 늘어났었다고 한다.

그렇게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박대희 사장은 북한에서 상주하다시피하면서 남북교역을 했고 북한에서는 어디든 다닐 수 있는 특별대우까지 받았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교역 중단을 골자로 한 “5.24조치가 발표되면서 직원들 월급은커녕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제껏 사람좋은 웃음을 짓던 박대희 사장의 표정에도 한 순간 고통스러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고 노력해야 한다

지난 918일 평양 대동강 수산물 시장을 찾아 수조 속 철갑상어를 구경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방송에 소개될 때 화면에 비추던 인물들 중에는 낮익은 얼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대북교역이 끊긴 후 두라영어조합은 아내와 두 아들(39, 37)이 함께 하는 가족기업으로 축소되었지만 해외에 양식기술을 전수하는가하면 철갑상어 가공품을 개발하는 등 변화와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바우덕이 축제기간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철갑상어를 공개하고,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국내에서도 북한처럼 철갑상어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인가?”일 것이다.

이에 대해 박대희 사장은 국내 철갑상어 양식이 대중화되고 그래서 일반 시민들도 철갑상어를 저렴한 가격에 먹으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면서 연구자와 민간, 그리고 관이 힘을 모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대희 사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했지만 답은 없이 미소만 돌아왔다. 박대희 사장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박대희 사장이 키우는 철갑상어, 흰색은 알을 밴 철갑상어다
박대희 사장이 키우는 철갑상어, 흰색은 알을 밴 철갑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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