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계보상의 문제점
남사당패 계보상의 문제점
  • 시사안성
  • 승인 2018.10.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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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13

일제 강점기의 남사당패들은 솟대쟁이, 굿중패, 모래굿패 등 전혀 다른 놀이집단과 섞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계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들 구성원들은 이종의 놀이집단 사이에도 섞이고, 같은 남사당패 사이에서도 서로가 교류하는 등 이합집산이 심하였기에 남사당패의 계보 파악 및 나아가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전환하는 과정의 뿌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박용태의 증언으로 알려진 최군선, 이경화, 홍덕화 등의 인물들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미 19세기 중후반에 남사당패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남사당패연구에서 미처 살펴보지 못한 더욱 이른 시기의 남사당 단원들이며, 남사당패의 기원이 19세기 중반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다.

그러나 이를 제보한 남운용의 처남인 박용태는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남사당은 해체되고, 그들이 재결성된 1961년에 남사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자 매형인 남운용은 이에 대하여 전혀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박용태의 증언이 정확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1968신동아 기고문에 따르면 그는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남사당에 입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69년 민속극회 남사당 덧뵈기 공연 전단지에 보면 남운용은 12세에 안성 남사당패의 이경화에게 덧뵈기를 배우고, 14세부터 오명선, 조운상에게 꼭두각시놀음을 배웠다고 하였다.

따라서 1907년생인 남운용은 12세인 1919년경에 처음 남사당에 입단하여 이경화에게 덧뵈기를 배웠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경화의 생몰년이 1851~1914년이 아니라 최소한 1919년 이후까지 생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홍덕화에 대하여 남운용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죽었다고 하고, 박용태는 1939년에 죽었다고 하여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사람에 대한 기억치고는 꽤 많은 시간차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같이 활동을 했던 남운용의 한국전쟁 때 죽었다는 말에 더욱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민속극회 남사당 제50회 기념 공연,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 8쪽짜리 안내 인쇄물.     *공연 일시 : 1969년 10월 16일 오후 7시     *공연 장소 : 서울 YWCA 강당 (명동 성모병원 앞)    *주     최 : 민속극회 남사당
민속극회 남사당 제50회 기념 공연,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 8쪽짜리 안내 인쇄물. *공연 일시 : 1969년 10월 16일 오후 7시 *공연 장소 : 서울 YWCA 강당 (명동 성모병원 앞) *주 최 : 민속극회 남사당

전단지에는 남운용이 충북 괴산출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1968년 본인의 신동아 기고문에 따르면 안성군 일죽면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본인의 회고록인 신동아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전단지라고 모두 정확한 내용만 담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경화와 부부사이라는 바우덕이의 생존연대에 대하여 살펴보면 남사당패연구에는 1900년대 초~1920년대까지 활동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으나, 양도일은 바우덕이가 고종 때 경복궁 중수식에서 하도 춤을 잘 추어 손을 잡아주었다 해서 손을 명주에 싸고 다녔다는 구체적인 일화까지 전하여 주었다.

양도일은 1907년생으로 6세가 되던 1913년 남사당에 입단하였기 때문에 1910~20년대 인물들은 대부분 같이 활동을 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는 바우덕이의 남편이라고 하는 이경화 역시 당시 모갑이로 같이 활동을 한 사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1865년 경복궁 중수식에서 춤을 춘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이경화가 남편이라는 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바우덕이는 23세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에 참가했다고 하면 1870년에 죽은 사람이 되므로 1920년대에 모갑이를 한 이경화의 부인으로는 시대상으로 맞지 않는다.

박용태는 이경화의 생몰년을 1851~1914년으로 이야기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한다면 1870년 사망한 바우덕이와의 부부 관계가 2~3년가량 가능하다. 이경화의 전 두목이 바우덕이라고 했으니 시대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양도일은 이경화와 안성복만이가 모갑이였던 1920년대에 같이 활동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 역시 계보 상 맞지 않는다. 결국 바우덕이는 이경화와 부부 사이가 아닐 뿐더러, 생몰년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전해져 오는 남사당패의 계보 중 1920년 이전의 계보는 오류가 많으며, 현재로서는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자료가 없어 다시 복원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에 개다리패와 진위패 두 패만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이미 제대로 된 남사당패는 개다리패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멸 했고 그들 중의 일부가 진위패를 만들었거나, 진위패의 일부가 개다리패에 합류를 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계통으로 보아 진위패는 덧뵈기를 이었고 개다리패는 덜미를 이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진위패는 사당패에서 전환된 남사당패인 것 같지는 않고, 지역 두레패가 덧뵈기를 배운 후 남사당 출신 구성원과 합류하여 공연을 하며 남사당패로 분류된 것 같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전환된 집단은 청룡리를 기반으로 한 개다리패가 유일하다고 판단된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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