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호국단과 안법고 밴드부(2)
학도호국단과 안법고 밴드부(2)
  • 시사안성
  • 승인 2018.10.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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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20
1960년대 안법고등학교 학도호국단 사열식 다음에 가진 분열식에서 단장 신원식 교장신부를 비롯한 임석 상관 앞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다

안성맞춤박물관에 기증한 사진 중에서 학도호국단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은 1954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의 학도호국단에 대한 추억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 힘든 학도호국단 훈련과 활동을 힘들지 않게 소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안법 밴드부 악대의 취주악 연주가 활력을 돋우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필자가 안법 밴드부를 잠깐 경험하게 된 동기는 다소 엉뚱하다. 중학교 새 교복을 멋있게 차려입고 입학한지 얼마 안 되는 날 복도를 지나 교무실 앞을 통과하려는 순간 안경 쓴 어느 선생님이 ! 너 이리와하면서 교무실 앞에 불러 세우는 것이 아닌가. 말씀인 즉 오늘 밴드부 소북(드럼)쟁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 대원이 비게 되니 네가 대신 나가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그날은 마침 월요일 애국조회 날이라서 밴드부가 전교생 맨 오른 쪽에서 애국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의식에서 음악 연주를 하는 날인데, 무조건 작은 북을 허리에 채워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가 서서 깍두기가 되어 시늉만 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1959년 재일교포 북송반대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궐기대회를 마치고 ‘일본 용공정책을 규탄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는 안법고 밴드부 모습이다
1959년 재일교포 북송반대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궐기대회를 마치고 ‘일본 용공정책을 규탄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는 안법고 밴드부 모습이다

밴드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학도호국단 열병식에서 사열 분열을 할 때였던 것으로 생각이 난다. 아마 중학교 때에는 경험해 보지도 못한 밴드부 만의 특권인 어깨에 술이 달린 밴드부 복장이 부러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기를 부는 기술이 없어서 가입 신청은 하지 못했다. 뽑힐 수도 없는 실력이었다.

초창기 안법 밴드부의 창설에 대하여 얼굴 작곡가 신귀복(4) 선배는 안법 10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본교의 밴드부는 1952년에 김승환(음악)선생님의 지도하에 12인조의 악기로 출발, 1953년도에 미 해병 통역장교로 있었던 유인식(영어)선생님이 부임하여 32인조로 재편성하였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여 방과 후 밤 10시까지 개인연습과 파트연습 그리고 합주의 순으로 매일 같이 피나는 노력으로 교내 행사는 물론,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신귀복 작곡가는 계속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여기에 옮겨 보겠다.

 

1980년대 안법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이 6. 25기념 행군 행사의 일환으로 안성읍 시가지를 통과하고 있는 밴드부의 사진이다
1980년대 안법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이 6. 25기념 행군 행사의 일환으로 안성읍 시가지를 통과하고 있는 밴드부의 사진이다

 

6. 25동란 직후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어 고등학교마다 군사훈련을 의무적으로 할 당시, 학교에서도 매주 월요일 제1교시에는 사열, 분열의 열병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 애국가, 교가 그리고 5~6곡의 행진곡을 연주할 수 있어야 되기 때문에 밴드부는 연주, 행진 등 훈련에 훈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도 매주 군내 궐기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안성공원까지 또 공원에서 학교까지 태극기, 교기, 학도호국단 단기를 앞세우고 밴드부의 힘찬 행진곡 연주와 행진에 발맞추어 뒤따라오는 전교생들이 행진을 멋있게,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안성공원에서 안법고등학교의 밴드부의 힘찬 연주와 하모니는 궐기대회의 뜻을 한데 모으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군민의 단결과 힘을 모으는 데에도 최적의 효과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 당시 전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등학교의 밴드부가 10여개 정도 있었는데, 안법고교의 밴드부는 그 중에서도 선두그룹에 속할 정도였다. 밴드부의 연주 실력은 대내외적으로 대단했기 때문에 본교의 자랑이자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진작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1955년 안성 신생극장에서 열린 ‘안성의 노래’(유달영 작사, 이흥렬 작곡) 선포식에서 제정된 종류의 악보 사본이다
1955년 안성 신생극장에서 열린 ‘안성의 노래’(유달영 작사, 이흥렬 작곡) 선포식에서 제정된 종류의 악보 사본이다

1955916일에는 안성군(김용석 군수)의 염원인 유달영 작사, 이흥렬(李興烈) 작곡의 안성의 노래가 제정되어 발표되는 행사가 신생극장에서 전 주민이 모인 자리에서 대대적으로 거행된 적이 있었다. 군민 행사를 위하여 동원된 안법 밴드부는 안성에서는 처음으로 이흥렬 작곡가가 직접 부르는 안성의 노래발표 곡을 직접 연주하였고 아울러 이흥렬 작곡가가 참석한 가운데 이흥렬 자장가(섬집아기), 어머니 은혜, 바위고개등의 가곡과 군가 진짜 사나이등을 안법 밴드부의 반주로 참석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함께 부른 추억은 안성을 감동시켰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 하였다.

안법 밴드부 출신 신귀복(申貴福) 작곡가는 당시의 행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흥렬 작곡가는 그 당시 48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한 후, 안성으로 오는 길가에 핀 화려한 코스모스가 아주 인상적이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안법 밴드부의 멋진 연주와 함께 작곡가 스스로 부르는 안성의 노래를 연주해 준 밴드부원 여러분의 음악성에 대단히 흐뭇했다.”고 말하면서 연주음악에 대하여 잠시 성취감에 취한 듯 하는 인사말에 깊은 감동을 가졌다고 하였다.

1980년대 안법고등학교 45인조 밴드부가 운동장에서 열린 교내 행사에서 행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학생들은 물론 교원들 까지 교련복으로 통일한 복장으로 학생들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1980년대 안법고등학교 45인조 밴드부가 운동장에서 열린 교내 행사에서 행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학생들은 물론 교원들 까지 교련복으로 통일한 복장으로 학생들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안법고는 가톨릭학교이기 때문에 종교음악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안성미리내 성지에서 거행된 순교자 현양대회, 장호원에서 거행된 성체거동(聖體擧動) 행사 등에 출전하려면 10여곡의 성가곡을 준비하여 연주할 수 있어야 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에 합숙 훈련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단체활동이기 때문에 단 한사람이 잘못하더라도 모두가 공동책임을 지는 훈련이기 때문에 합숙훈련에서 닦은 실력은 가히 대단했다고 한다. 자기 악기 이외에 한 두 개 정도의 악기를 더 다룰 줄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동기생(8) 중에는 신O(트럼펫), O(소북, 대북), O(트롬본), O(클라리넷) 4명이 있었다. 밴드부 출신 들은 당시 공군본부, 해군본부 군악대원으로 군 복무를 마치기도 했으며 교직, 작곡가, 사회음악인, 연주가, 오케스트라 단원 등 다양한 직업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밴드부는 학도호국단의 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국경절 행사와 기념일, 궐기대회, 종교행사에서 뜻을 모으고 힘을 돋우는데 최적의 효과를 거두게 하였으며 특히 학생들에게는 애교심과 진취적 기상, 단결력을 고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밴드부는 안법의 자랑이며 자긍심이라는 생각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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