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4.16 22: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에 앞서

4. 18 고대생 피습 사건과 4.19 한복판에 서다

연재에 앞서

필자는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자료(사진, 서적, 문서류, 역사자료 등) 400여점을 두 차례에 걸쳐서 안성시(안성맞춤박물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자료(고서적, 사진, 이콘 등) 80여점은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또한 고려대학교 역사기록관, 안성초등학교 기념관에도 몇 점의 관계 자료를 보내어 보존토록 하였다.

보낸 자료는 안성맞춤박물관 기획 출판물인 안성 근현대 사진첩(1) ‘근현대 안성인의 삶’(2003, 12)23, 기증유물 전시회 기획품인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 12)28, 기증문화재 기획전시(2011, 12) 책자에 10점이 소개 된바가 있다.

 

이밖에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 자료인 성경 직해’(1897), ‘주교요지’(1897), ‘경향잡지’(19161~12월호) 12권 묶음 등은 안성 구포동성당 소장유물 기초 학술조사 보고서(안성시/단국대 산학협력단 공동연구/2016, 1)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안성군지(1990), 안성시지(2011) 집필위원 역할, 안성성당 사목회 문화재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문화 예술의 도시 안성을 이룩한데 귀중한 자료인 근대, 현대 유물자료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상의례는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삶의 중요한 고비에 행해지는 의식인데 당시에 찍어 놓은 사진들은 일생을 거치면서 또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80세를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니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세에게 평생교육 자료로 남겨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차제에 사진 한 장 한 장, 자료 하나 하나에 담긴 역사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해 줄 수 없느냐는 제언을 받고 고민 하였다.

앞으로 소개하게 될 이야기에는 성장시절의 사생활, 한 장도 빼놓지 않고 모은 초등학교 성적표와 상장, 1960년 격동기에 보낸 대학생활, 교편생활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고 있던 보람된 현장, 그때 그 시절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엮어질 예정이다.

이 밖에 안성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청년회의소(JC) 창립이야기, 경기도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 안성 구포동 성당에 기증한 자료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필자가 기증한 자료 원본 소유권은 안성맞춤박물관, 안성성당, 고려대학교 역사기록관에 있음을 밝히며, 소장기관에서 기증자에게 제작해준 CD를 활용하여 전개해 나갈 것이다.

한편 연재에 앞서 우려되는 것은 대단한 글이나 자료인 줄 알고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실망을 주거나 필자의 건강문제이다.

그냥 살아온 평범한 삶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하찮은 사진들을 근대, 현대 유물 등록문화재로 발굴하면서 문화재 보존에 앞장서고 있는 안성맞춤박물관 공무원과 인터넷 신문 시사 안성창간호부터 연재를 허락하여 준 발행인에게 감사드리며, 독자님들의 너그러운 이해와 지도편달을 바란다

 

* 편집자주 :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가 이번주에는 4.18과 4.19를 앞두고 특별히 "연재에 앞서"에 이어 "4.18고대생 피습사건과 4.19한복판에 서다"를 연재합니다.

 

4. 18 고대생 피습 사건과 4.19 한복판에 서다

 

1960418일 필자는 서울 서소문동 사는 안성 숭인동 아저씨네 철물가게 다락방에서 매우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당시 3. 15부정선거의 여파로 시국이 뒤숭숭 하였지만 오늘은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해 준다는 날이다.

안성 촌놈이 서울에 와서 짐짝 시내버스를 두세 번 바꿔 타는 일에 익숙해 졌으니 이제 자신감이 생기고 여학생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여 인촌 동상 앞으로 올라가니 모두 기개가 충만해 보인다.

1250분에 학생회 간부 6~7명이 군기를 잡듯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 보더니 갑자기 뭔가 허연 뭉치 덩어리 같은 것을 머리위로 휙 던졌다. “모두 머리에 동여매!”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리들은 허겁지겁 이마에 질끈 동여매었다.

 

고대교우회보(2017. 4. 10)에 실린 4. 18의거 기념탑 기사(개인보관중인 회보 스캔)
고대교우회보(2017. 4. 10)에 실린 4. 18의거 기념탑 기사(개인보관중인 회보 스캔)
역시 개인 소장중인 고대교우회보를 스캔한 자료다. 모두 세장의 사진이 보이는데 1) 4. 18의거 당일 본관 앞에 집합한 고대생들.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프래카드가 보인다. 2) 광화문을 지나 국회의사당 앞으로 진출하는 고대생들과 저지하는 경찰관 모습 3) 경찰의 저지를 뚫고 동대문을 지나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가는 학생들 현장 사진
역시 개인 소장중인 고대교우회보를 스캔한 자료다. 모두 세장의 사진이 보이는데 1) 4. 18의거 당일 본관 앞에 집합한 고대생들.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프래카드가 보인다. 2) 광화문을 지나 국회의사당 앞으로 진출하는 고대생들과 저지하는 경찰관 모습 3) 경찰의 저지를 뚫고 동대문을 지나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가는 학생들 현장 사진

서로 쳐다보니 빨간 글씨로 고대라고 인쇄한 궐기용 머리띠였다. 전교생이 거의 다 모였는지 몇 천 명 넘는 학생들로 광장을 꽉 채웠다.

갑자기 4학년선배(이세기/전 국회의원)가 앞으로 나오더니 친애하는 고대생 제군!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로 시작하는 <4.18선언문>을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시국선언문이다. 당시 고대신문 편집국장 박찬세(법학) 선배가 비밀리에 자필로 써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학생회 간부들은 자유당 비밀경찰 몰래 속전속결 벼락치기로 시위를 지휘하였다. 선두에는 이기택(전 국회의원) 강우정(법대학생회장) 4학년 선배도 있었다.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민주 역적 몰아내자느닷없이 구호를 외치더니 프래카드를 흔들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처장인 현승종 교수(전 국무총리)가 철문을 막아섰지만 호랑이처럼 무섭게 내닫는 시위대는 1초만에 교문을 뚫고 쏟아져나갔다.

법대생들은 항상 선두에 섰다. 안암동 로터리, 종로4가를 거쳐 광화문 쪽으로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면서 목이 터져라 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렸다.

급히 동원된 대규모 경찰저지선도 소용없었다. 오후 2시 지나 500여명의 선발대를 필두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진출에 성공하였다.

고대생들은 속속 도착하는 대로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민주 반역은 사죄하라”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 “정치 책임자는 마산사건에 답변하라” “정부는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학생들의 자유토론과 대정부 성토는 계속됐다.

사실상 이승만 정권 퇴진운동이다. 유진오 총장과 법대 선배이며 달변가 이철승 의원 등의 설득으로 해 질 무렵 안암동 교정으로 일시 퇴진하기로 하였다. 귀교길 안전보장 약속 하에 선도하던 경찰차를 믿고 행진하던 고대생들은 어둑어둑한 을지로에서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으로 꺾어지자마자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양냥이줄로 무장한 정치깡패들에게 기습을 당해 선두에 있던 40여명의 학생들이 머리가 터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퍽 퍽 쓰러지고 말았다. 선두에서 신입생들을 보호하던 공수부, 역도부 선배들이다.

신입생들은 바로 뒤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대단하였다. 다음날419일 조간신문에 고대생 피습사건이 대서특필되었고 <고대생 1명 피살(?)>이란 놀라운 보도에 격분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날부터 몇 일간 계속되면서 모든 대학에서 물밀 듯이 터져 나온 일련의 대규모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전진하다가 경찰 폭행에 흥분하여 서울신문사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밤에는 경무대 담을 넘어 쳐들어가려고 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대학생들이 사망하는 유혈 데모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역시 고대회보를 스캔한 자료다.왼쪽 사진은 농성중인 고대 학생들 앞에 나선 유진오 총장이고, 오른쪽 사진은  4. 18의거 당시 고대생들이 머리에 둘렀던 수건이다. 수건 상단엔 '1960'숫자(60학번인 필자가 신입생 때)가 인쇄되어 있다, 수건 하단엔 '축 입학'이란 글자를 인쇄하였다. 경찰에게 압수 당할것을 대비해서 시위용이 아니라 신입생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설명하기위해서 인쇄된 것이라고 한다
역시 고대회보를 스캔한 자료다.왼쪽 사진은 농성중인 고대 학생들 앞에 나선 유진오 총장이고, 오른쪽 사진은 4. 18의거 당시 고대생들이 머리에 둘렀던 수건이다. 수건 상단엔 '1960'숫자(60학번인 필자가 신입생 때)가 인쇄되어 있다, 수건 하단엔 '축 입학'이란 글자를 인쇄하였다. 경찰에게 압수 당할것을 대비해서 시위용이 아니라 신입생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설명하기위해서 인쇄된 것이라고 한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961년 4월에 대학 본관앞에 세워진 고대 4. 18의거 기념탑(뒷면에 새겨진 격문)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961년 4월에 대학 본관앞에 세워진 고대 4. 18의거 기념탑(뒷면에 새겨진 격문)

 

대통령 하야라는 위기를 느낀 경찰은 시위자를 무조건 체포하는 험악한 시국으로 변하였다. 423, 4일인가 평상시와 같이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고 달려 나온 고대생들은 안암동 입구에서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더욱 사기충천하여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경찰이 배치한 소방차에서 내뿜는 빨강색 물벼락을 맞고 놀라서 우왕좌왕 흩어져버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시위대에서 이탈한 학생들은 날이 어둡기 시작하자 귀가를 서두르던 중 갑자기 경찰이 시내버스를 세우고 올라타더니 옷에 빨강색으로 얼룩진 학생들을 마구 끌어내 연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다음날 조심조심 용산 시외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안성으로 도망쳐오고 말았다. 늙으신 부모님은 3대독자 외아들과 한 이불을 덥고 하룻밤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왁자지껄 옥천동에 사는 반공청년단 아저씨들이 집에 찾아와 무엇 때문에 데모를 했느냐고 따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

서울신문사에 불 지른 대학생 놈들은 모두 빨갱이라며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데모가 날이 갈수록 더욱 확산되자 426일엔 대학교수들까지 프래카드를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이승만 독재자는 드디어 하야를 선언하고 말았다. 하야한 날엔 도주한 이기붕집으로 쳐들어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고려대학교 4. 18의거실록(2017, 4,19 고대출판부)에 의하면 “4. 18고대의거는 자유당독재와 부정에 맞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항거를 하나의 주된 줄기로 결집시키고 그 무대를 지방에서 서울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기록되어있다.

1961년 4월18일 교정에서 "4. 18 고대의거 1주년 기념식 마치고 법학과 2학년 동기생인 절친 김용태(법학박사/전 교수)와 함께 기념탑앞에서 찍은 사진, 1주년 기념식 행사때 헌화한 화환 10여개가 기념탑 앞에 놓여있다.
1961년 4월18일 교정에서 "4. 18 고대의거 1주년 기념식 마치고 법학과 2학년 동기생인 절친 김용태(법학박사/전 교수)와 함께 기념탑앞에서 찍은 사진, 1주년 기념식 행사때 헌화한 화환 10여개가 기념탑 앞에 놓여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