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봉리 선영(先塋) 수호
덕봉리 선영(先塋) 수호
  • 시사안성
  • 승인 2018.10.0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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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6

덕봉리 뒷산은 해주오씨 정무공파의 선산으로 입향조(入鄕祖)인 해주오씨 11세 오현경(吳賢卿, ? ~ 1525년 중종 20)부터 그 이후 선대 분묘가 모여 있다. 지금까지 오씨종중에서는 선산 보호와 유지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몇 차례에 걸쳐 선산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 종중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였다.

첫 번째 위기는 종산이 벌목으로 황폐화되어 선영이 위태롭게 되고 여기에 송충이 극심하여 나머지 소나무도 고사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거금(巨金)을 희사해 선산보호에 힘쓰고, 선산금양(禁養)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분들이

있다.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산은 울창한 나무숲이 유지되었고 선영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선산 보호에 헌신한 대표적인 두 분은 오정근(吳正根)과 오준근(吳準根)이다.

참판 오정근 기적비
참판 오정근 기적비

 

오정근(1868, 고종 5 ~ 1946)의 호는 소파(小坡). 생부는 오흥영(吳興泳)인데 이조판서 오준영(吳俊泳)에게 입양되었다. 오정근은 부마 해창위의 7세손으로 1885(고종22)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 궁내부 특진관 원임(참판)을 끝으로 갑오경장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홀연히 은퇴하였다.

공은 한일합방으로 인심이 점차 흐트러져 500여 년 동안 선영이 있는 종산이 황폐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거금(巨金: 1916800, 1932400)을 내어 종중을 도왔다.

이 돈은 일제 강점기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던 종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황폐화된 종산의 치산(治山)사업과 송충구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이 선조들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데 감동한 제족들의 뜻을 모아 종중에서 기적비를 세워 칭송하고 있다.

오준근 기적비
오준근 기적비

 

 

오준근(吳準根1867, 고종 4 ~ 1931)은 자가 문옥(文玉)으로 평생 동안 치산금양(治山禁養)을 비롯하여 종사(宗事)에 헌신하여, 제족(諸族)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를 세워 칭송하고 있다.

500여 년간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덕봉리 종산(안산)이 일제 강점기에 인심이 흐트러짐에 따라 황폐해졌다. 더구나 1911년에는 벌목으로 인해 온 산이 벌거숭이가 되고 사태가나 선영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이를 걱정하면서 제족들과 함께 사방공사, 식목, 송충 구제에 힘쓰는 한편, 엄하게 금양(禁養: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가꿈)의 규칙을 세워 관리한 결과 종산은 전과 같이 울창하게 회복되고 선대 묘소도 안전하게 되었다.

두 번째 위기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김 모 변호사가 이 지역에 광허권(鑛許權)을 얻어 중개인을 보내 오씨종중에 광허권을 사라. 그렇지 않으면 부득이 채굴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그 사람은 본래 채굴이 목적이 아니라 오씨종중에 광허권을 팔아 이득을 보려고 잔꾀를 부려 광허권 인가를 받은 자였다.

오씨종중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남의 분묘를 훼손하면서 채굴할 수는 없다. 김모 변호사 그 사람도 문제지만 허가를 내준 총독부에도 문제가 있다. 이는 도굴꾼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후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야 한다고 결의하였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입산을 엄금하였다.

또한 덕봉서원에도 통보하여 배향된 양곡(오두인)의 분묘도 온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렸다. 덕봉서원에서는 긴급히 유림(儒林)을 소집하여 연명으로 일본 총독에게 어찌 충신의 묘소가 있는 곳에 광허권을 허락해 분묘를 훼손하게 할 수 있는가?”하고 항의했다. 일본 총독은 실정을 잘 몰랐다. 이미 허가된 광허권을 취소할 수는 없으나 채굴은 하지 못하게 하겠다. 지나친 염려는 안해도 된다고 하였다.

그 뒤 3년이 지나 김모 변호사는 광허권을 경매 처분하여 사건은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에 또 김한태(金漢泰)라는 자가 채굴을 호언장담하며 광허권을 얻었으나 채굴은 하지 못해 선영은 다행히 보존되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힘쓴 사람은 인근에 거주하는 후손들이었으나, 특히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저지 방법을 제시하고 선도하여 힘쓴 분은 향리의 오성환(吳晟煥)과 서울의 오윤영(吳允泳), 오정근(吳正根), 오성환(吳誠煥)이고, 종중의 임원 오혜근(吳惠根), 오윤근(吳潤根), 오맹근(吳孟根) 등은 안성군청과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수고하였다.

이때 긴급히 모여 연명한 유림은 230여 명인데 대표로 선출된 분은 이교성, 박일량, 봉재덕이고 읍면장으로 참석하여 협조한 분은 서상준, 남길우, 유창목이고 안성군수 안창환도 많은 협조를 했다.

제청방 일대의 선대 묘소는 후손들이 이렇게 일치단결하여 결사 저지했기 때문에 보존 될 수 있었다. 이 때 집회에 함께 한 250여 제족 여러분과 이 사건 처리에 함께 고생한 경향 각지의 제족, 여기에 협조한 서원의 유림 여러분, 각 기관의 대표 모든 분들의 노고로 덕봉리 해주오씨들이 불효(不孝)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농재집단기 4331, 1982.

종규유묵2013.

해주오씨세보2013.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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