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덕이는 누구인가?
바우덕이는 누구인가?
  • 시사안성
  • 승인 2018.10.0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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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12
황성신문 1909년 10월 2일
황성신문 1909년 10월 2일

1909황성신문에는 비취란 여인이 노래를 잘한다고 소개하며 비록 안성청룡 바위덕이가 와도 그 머리를 뒤로하고 쥐구멍을 찾겠다더라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로 보아 바우덕이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창으로 이름났음이 증명되었는데, 문제는 기사 작성 당시 바우덕이가 생존을 하고 있던 사람인가 아니면 죽었지만 그 명성이 당시까지 내려오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이 기사만 가지고는 경복궁에 갔었음을 유추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23살에 죽었다고 하는 바우덕이가 1920년대 까지 활동한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는 시대가 앞선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심우성이 작성한 계보에 실증적 논리가 충분치 않음을 의미한다. 바우덕이의 활동시대에 대하여 중앙대학교 정형호 교수는 다양한 구술자료와 기완별록, 경복궁영건가, 승정원일기 등 여러 문헌을 분석하여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사람임을 입증한바 있다.

양도일은 1907년 생으로 6세에 남사당에 입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1920년대 남사당 계보에 관하여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양도일의 제보로 보았을 때 이경화의 나이 및 활동 시대에 대하여는 서연호 교수나 심우성 교수 모두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여 보면 이경화의 나이, 활동시대, 그리고 이경화가 바우덕이의 남편인지 아닌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이경화가 바우덕이 보다 30살이나 위라고 한 심우성 교수의 기록에서부터 남사당패 계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2018년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이
2018년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의 한 장면

 

남사당패연구를 통하여 크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1900년대 초반에는 이운선이 곰뱅이쇠로 있던 진위패와 바우덕이의 개다리패 등 2개의 남사당패가 있었고, 그 후 1910년대 후반부터 그 두 패의 직계 후예이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안성복만이패, 오명선패, 원육덕패, 심선옥패 등 몇 개의 패가 이합집산을 거쳐 193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이들 구성원들은 한군데에 계속 소속된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옮겨 다녔다는 것이다.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과 송석하의 사당고에 나오는 전국 사당패의 근거지 13곳 중 명확하게 남사당패로 전환된 곳은 청룡리 하나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사당패에 관한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진위패가 갑자기 남사당 계보에 등장하더니 일제강점기 최후까지 남은 두 군데 중 한 군데가 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두 패는 서로 기예에 대한 지도를 해주는 등 긴밀하게 교류를 하였고, 남사당 해체기인 1930년대 초에는 남운용, 정일파, 양도일 같은 주요 멤버들이 개다리패와 진위패 모두를 오가며 이합집산을 하였다.

사당패가 남사당패로 전환되는 1900년 무렵에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기존과 다른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들은 점점 걸립패와 같은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이 무렵 유랑예인패들은 자유로운 공연을 다니지 못하고 관()에 의한 허가를 받는 제도가 생겼는데 여기에 적응하기 위하여 사당패에서 전환과정의 남사당패들은, 절걸립이나 다리걸립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합집산하는 걸립패들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게 된다.

2018년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버나
2018년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버나 돌리기의 한 장면

 

이 당시의 남사당패들은 솟대쟁이, 굿중패, 모래굿패 등 전혀 다른 놀이집단과 섞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계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들 구성원들은 이종의 놀이집단 사이에도 섞이고, 같은 남사당패 사이에서도 서로가 교류하는 등 이합집산이 심하였기에 남사당패의 계보 파악 및 나아가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전환하는 과정의 뿌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박용태의 증언으로 알려진 최군선, 이경화, 홍덕화 등의 인물들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미 19세기 중후반에 남사당패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남사당패연구에서 미처 살펴보지 못한 더욱 이른 시기의 남사당 단원들이며, 남사당패의 기원이 19세기 중반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다.

그러나 이를 제보한 남운용의 처남인 박용태는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남사당은 해체되고, 그들이 재결성된 1961년에 남사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자 매형인 남운용은 이에 대하여 전혀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박용태의 증언이 정확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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