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호국단과 안법고 밴드부(1)
학도호국단과 안법고 밴드부(1)
  • 시사안성
  • 승인 2018.10.0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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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9
규율부 단체사진/14.9x10.9cm(안성맞춤박물관 최홍렬기증) 1956년 12월 22일 안성성당 계단에서 촬영한 안법중학교 제8회 졸업생으로 이루어진 학도호국단 규율부 단체 사진이다. 가운데 사제복장이 임세빈 교장신부이고 앞줄 교원과 함께 찍은 필자의 동기동창들이다
규율부 단체사진/14.9x10.9cm(안성맞춤박물관 최홍렬기증) 1956년 12월 22일 안성성당 계단에서 촬영한 안법중학교 제8회 졸업생으로 이루어진 학도호국단 규율부 단체 사진이다. 가운데 사제복장이 임세빈 교장신부이고 앞줄 교원과 함께 찍은 필자의 동기동창들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는 학도호국단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학창시절에 학도대라는 이름의 학도호국단 활동을 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교내 열병식 때에는 밴드부(악대)의 신나는 행진곡 연주와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추억에 아른거린다.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1949422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문교부에서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학도 층의 사상통일과 유사시 향토방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한 학생단체라는 검색이 가능하다.

역사를 찾아보니,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서 관변단체로 이용되다가 19604. 19이후 해체되었는데 1975520일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10월 유신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이 재 설치되었다. 그 후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따라 전두환 군부정권의 집권 중반기인 1985314일에 대학교, 198631일에는 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이 각각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학도호국단의 조직은 중앙 학도호국단 명칭으로 본부를 두고 각 시도별, 대학별, 학교별로 호국대를 두고 운영하였다. 필자가 재학 중 활동하던 당시에는 학도호국단 전국 체육대회, 웅변대회도 개최하였고 미군철수 반대 궐기대회, 반공방일(反共防日) 궐기대회 등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학생들에게는 학도호국단 입단비와 월회비도 수업료와 함께 납부하던 시대였다.

전국 남자 중고교 간부 학도 훈련기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1959년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신흥대학교(지금의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문교부와 중앙학도호국단 주최 전국남자 중고등학교 학생위원장들이 모여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4박5일간 훈련을 마치고 나서 찍은 기념사진이다(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은 안성농고 학생위원장이고 필자는 뒷줄 왼쪽에서 13번째 사진이다)
전국 남자 중고교 간부 학도 훈련기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1959년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신흥대학교(지금의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문교부와 중앙학도호국단 주최 전국남자 중고등학교 학생위원장들이 모여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4박5일간 훈련을 마치고 나서 찍은 기념사진이다(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은 안성농고 학생위원장이고 필자는 뒷줄 왼쪽에서 13번째 사진이다)

필자가 학도호국단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0년대 초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을 때 자동적으로 가입되면서 부터이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병설교로 되어있어서 연대 편성이 되어 있었다. 3학년 때는 학도호국단 제2대대 대대참모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첫 경험으로 학도대 간부학생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월요일마다 애국조회를 하는 날이면 교무실에 보관된 가죽 끈으로 된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뻐기는 심정으로 조회에 참석하여 선두 대열에 서서 간부학생의 역할을 충실하게 실행 하였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역시 자동적으로 호국단 제 1대대에 편성이 되었다. 195441일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니 교련 과목이 있었다. 2학년, 3학년 때에는 과목은 없었고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 시간에 사열, 분열 만 있었다. 교련시간엔 자주 운동장에 나가 열병식(閱兵式) 연습을 주로 했다. 가장 기초적인 훈련은 행진이다. ‘앞으로 잇 가!’ ‘뒤로 돌아 가!’ ‘줄줄이 좌향 앞으로 가!’ ‘제자리에 서!’ 등 행렬 연습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행진 도중에 손과 발이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학생들이 많아서 개인기합은 물론 단체기합도 적잖이 받았다.

사열식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눈동자와 복장단정이다. 1때에는 임세빈 교장신부님이 군에서 장교(군종)출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사열 때 학생들 대열 앞을 지나며 검열 할 때에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정신자세가 빠져있는 학생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발목을 걷어차기 때문에 가끔 그 자리에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었다. 1, 2학년 때에는 학생간부로서 학급별 소대에서 선두에 항상 서야하기 때문에 대열은 어떻게 서야하고, 어떻게 경례를 붙이고 중대장 또는 대대장과 어떻게 이동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지 등의 요령을 익히고 또 훈련하였다.

3학년에 올라가서 학생 간부로 임명되어 연대참모로 뽑혔을 땐, 대열 맨 선두에서 다리엔 각반(脚絆)과 가죽으로 된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밴드부의 신나는 행진곡 소리에 맞추어 씩씩하게 행진하였던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사열대 앞을 통과할 때에는 연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임석 상관에 대한 경례를 할 때가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당시 안법고 배석 장교인 최O기 교관의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목소리는 학교 운동장을 떠날 듯 크게 울렸기 때문에 훈련의 효과를 백퍼센트 달성하는 효과를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강의 수영 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959년 8월 18일 전국 남자 중고교 학생위원장들의 간부학생 훈련에서 체육활동의 일환으로 한강에서 가진 수영 강습 후 훈련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필자는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이다)
한강의 수영 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959년 8월 18일 전국 남자 중고교 학생위원장들의 간부학생 훈련에서 체육활동의 일환으로 한강에서 가진 수영 강습 후 훈련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필자는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이다)

필자에게는 학도호국단과 관련해서 특별히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법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학교를 대표해서 전국 남자 중고교 간부 학도 훈련에 참가했던 일이다. 1959년 당시 문교부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중앙학도호국단(단장 최재유/문교부장관) 주관으로 전국의 학도호국단 산하 남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위원장을 소집하여 817일부터 821일까지 45일간 서울의 신흥대학교(지금의 경희대학교)에서 합숙으로 이루어진 특별훈련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교육 일정이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학도호국단의 구성과 임무, 국가관, 간부 학도로서의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집단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운동장에서의 군사훈련은 물론 체육활동을 비롯하여 야외인 한강에 나가 하루 종일 수영훈련도 받았다. 고등학교만 별도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과 분과별로 토론활동도 받았던 것으로 생각난다.

 

중앙학도호국단 간부학생 훈련 수료증(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8월 21일자로 수료식에서 받은 중앙학도호국단 단장(최재유/문교부장관) 명의의 훈련 수료증이다
중앙학도호국단 간부학생 훈련 수료증(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8월 21일자로 수료식에서 받은 중앙학도호국단 단장(최재유/문교부장관) 명의의 훈련 수료증이다

 

안성읍내에서는 공립인 안성농고와 사립 안법고등학교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입장에서 학교 전통과 학업 성적, 선배들의 배출에 대하여 주로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안성공원에서 열리는 안성군내 궐기대회에서는 서로 자기학교가 선두에 서서 시가행진을 하려고 여러 차례 신경전을 벌이던 경쟁자였다. 물론 학업에 대한 평가는 물론 양교 학생간의 물리적인 충돌까지도 종종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난다.

궐기대회를 마친 후에 나가는 시가행진에서는 다행히 안법고의 악대가 있어서 악대를 내세워 군내 다른 학교 보다 항상 선두에 서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군민들이 도열하여 박수를 보내는 맛을 가장 먼저 맛보는 우월감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훈련 장소인 신흥대학교에 가보니 마침 잘 알고 지내는 안성농고 학생위원장 홍O(전 국회의원) 학생도 있어서 외롭지 않았었다. 필자의 내성적인 성격과는 달리 외향적 성격을 가진 홍군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항상 리드하고 훈련교수들 심부름도 잘하는 바람에 전국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었다. 개회식 끝난 후에는 참가하고 있는 전국 학도들의 총대표로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필자 역시 훈련에 참가한 읍내 고등학교 학생의 동료의식으로 아주 마음 편하게 훈련을 받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학도호국단 분열 행진 모습(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1970년대 안법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열병식 후에 이어진 분열식에서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학도호국단 분열 행진 모습(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1970년대 안법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열병식 후에 이어진 분열식에서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수료증을 나란히 받고 안성으로 돌아온 그 후에도 옥천동에 살 때 앞 집 절친한 친구 류O형 집에 놀러온 홍군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서로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와 그가 배우 활동을 하였을 때나 서울 도봉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을 때에도 관심을 가진 바 있다. 특히 정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홍O우 선거 돌격대, 거지대장 김O삼씨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커다란 화제 거리가 된바 있다.

 

1959821일은 45일간의 전국 학도 훈련을 모두 마치고 수료식을 하는 날이다. 수료식엔 최재유(崔在裕)문교부 장관을 비롯하여 중앙학도호국단 요원들이 많이 참석하였었다. 수료식 때 받은 수료증을 들여다보며 이제 학교 현장에 돌아가서 나라를 위한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학교를 위한 봉사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면서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게 되면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하였다.(다음호에 계속)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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