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 시사안성
  • 승인 2022.12.28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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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량 교수의 노래하는 인문학
오태식 교수님이 만들어 주신 포스터

아내와 함께 즐겨 다니는 단골 카페가 있다. 그 카페 앞에서 우연히 어느 신부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신부님은 안법고등학교에 계신다고 했고, 나는 헤세 문학 전문가이자 노래하는 인문학자라고 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한 달쯤 후에 학교에서 일일 찻집을 여는데, 그때 특강을 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선뜻 그 제안에 응했다.

며칠 후 아내와 나는 학교를 방문했다. 알고 보니 그 신부님은 안법고등학교 교장신부님이셨다. 신부님의 친절한 학교 안내와 설명을 통해 우리는 안법고가 얼마나 훌륭한 학교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숭고한 가톨릭 신앙에 기반을 둔 교장신부님의 교육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한참 동안 학교를 둘러본 후, 우리는 교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신부님은 이내 자그마한 문서 하나를 내놓으시면서, 거기에 적혀 있는 글을 함께 낭송하면서 기도를 하자고 했다. 그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였다. 학교를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 기도문을 함께 낭송한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 강연 포스터를 전달하고자 다시 학교를 찾아갔을 때도, 우리는 신부님과 함께 이 기도문을 낭송했다. 참 멋지고 인상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 온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나는 더욱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된 것은 20대 후반, 대학원에서 헤르만 헤세 문학을 연구하던 때였다. 헤세의 초기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헤세가 성 프란치스코를 아주 사랑하고 존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성현들 중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어느 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여 겸허하게 하느님을 찬양하며 섬긴 분이다. 그분처럼 하느님의 고귀한 뜻을 그토록 숭고하게 펼치신 분도 드물 것이다.

헤세는 성 프란치스코의 덕목 중에서 특히 청랑성 Heiterkeit’을 높이 샀다. ‘청랑晴朗이라는 것은 동심童心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도 해맑은 심성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내 삶과 함께해 온 구절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다. 나의 호가 청랑이며, 노래하는 인문학이 동심을 노래하는 동요운동인 것도 다 여기에 연결되어 있다.

 

안법고등학교 강연을 두고 묵상하던 중,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생각났다. 내가 목원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30여 년 동안 나의 연구실에 걸려있었던 액자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이다. 몇 년 전 은퇴할 때, 나는 그 액자를 제자인 동료교수에게 선물로 주고 나왔다.

여러모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 성탄절을 마음에 품고 이 기도문을 낭송하면서 우리 모두 평화를 향해 나아가자!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정경량(노래하는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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