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계보의 문제 Ⅱ
남사당패 계보의 문제 Ⅱ
  • 시사안성
  • 승인 2018.09.1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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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11
2018년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살판
2018년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살판

변강쇠가사당고에 보이는 전국적으로 근거지가 명확한 사당패 중에 청룡리 이외 다른 사당패들은 19세기 말에 들어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할 길이 없다. 이들이 남사당패로 전환을 하였는지 아니면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는지 알 수 없는데, 이는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전환이 명확한 곳은 청룡리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 분포하던 사당패가 사라지고 난 후 남사당패 등 다른 놀이패가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소멸 또는 이주하여 다른 조직에 흡수되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계보상 확인 가능한 남사당패는 모두 안성 인근에 모인 것으로 보아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의 변화시기에 청룡리패를 제외한 다른 사당패는 모두 사라졌거나 다른 종류의 놀이패로 바뀌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초기 남사당패의 중요 구성원들은 모두 청룡리 출신임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심우성의 조사에 의하면 192030년대 남사당패 계보는 6개가 있었으며, 해체기에 이르면 경기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 있던 남사당패는 모두 없어졌고, 이후 경기도에서도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중 마지막 남은 남사당패가 청룡리 남사당패라고 하였다. 남운용이 1927년에 15개의 남사당패가 있었다고 하였고, 송순갑은 1922년 무렵에는 3개의 패가 있었다고 하는 것과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심우성이나 남운용, 송순갑 모두 남사당패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몰랐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나온 단행본, 무형문화재보고서, 1960~80년대 신문 인터뷰 등 각종 기록에 나타난 남사당 계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3가지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첫째, 심우성이 남사당패연구에서 정일파 구술을 정리한 내용으로, 덧뵈기 계열은 진위패 이운선이 1900년경 원각사 공연에서 시작하여 그 후계자 이경화가 바우덕이의 개다리패 가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내용이다. 남사당 관련 논문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계보는 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는 관련 논문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둘째, 서연호는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에서 박용태의 증언으로 덜미 계열의 이경화(1851~1914), 최군선(1852~1917), 홍덕화(1870~1939), 이호경(1890~1959)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의 계보를 추가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경화란 인물을 덜미 계열을 전수한 가장 선대의 사람으로 묘사하여, 남사당패연구에서 말한 이경화가 일제강점기 사람으로 덧뵈기 계열을 전수하였다는 말과는 다르다.

셋째, 마지막으로 청룡리 주민의 구전 및 양도일 증언으로 고종(또는 대원군) 때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 시 공연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윤광봉의 유랑예인과 꼭두각시놀음, 동아일보등에 나오는 이야기로 청룡리에서는 현재도 보편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바우덕이의 거사(남편)라고 하는 이경화의 활동시대는 앞서 본 남사당패연구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에 나오는 두 계보와 전혀 다르다.

1930년대 꼭두각시 인형 홍동지
1930년대 꼭두각시 인형 홍동지

 

남사당패연구에서 덧뵈기 계통은 이운선이 진위패 덧뵈기의 곰뱅이쇠로 1900년 초 원각사 공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원각사는 1908년에 세워져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첫 공연은 그 사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심우성은 남사당의 성립을 1908년 전후에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같은 책 다른 쪽에서는 1900년대 초반을 남사당패의 말기라고 하여 남사당의 시말에 대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였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성립에 대한 그의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남사당패연구에서 말하는 이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이경화는 이운선에게 덧뵈기를 사사하였고, 당시 조정에까지 출입하던 사당 바우덕이의 힘을 입어 개다리패 가열에게 덧뵈기를 가르쳤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운선과 바우덕이는 1900년 초 비슷한 시기에 따로 활동하던 놀이패였고, 이경화는 이운선과 바우덕이패 사이를 오가며 공연한 후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바우덕이의 개다리패는 복만이패로, 진위패는 심선옥패로 이어졌으며, 계보를 잘 알 수 없는 오명선패가 존재했다가 1935년에 사라졌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1900년 초에는 기존에 있던 사당패가 모두 사라지고 개다리패와 진위패 두 패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개다리패는 안성복만이패원육덕패양도일손만대로 이어졌으며, 덧뵈기 계열은 진위패 이운선이경화안성복만이패전근배정일파로 이어졌다.

결국 개다리패와 진위패는 안성복만이패 대에서 하나로 합쳐진 셈이다. 그리고 중간에 잠깐 등장한 오명선패와 심선옥패도 정일파남운용김문학양도일송순갑 등이 주류를 이루는 패들로 개다리패와 진위패의 후예들이 이합집산 과정에서 잠깐 몸담은 단체 수준이다. 심우성이 남긴 남사당 계보는 복잡하지만 사실 시작은 개다리패와 진위패 두 패가 전부이고, 이것이 안성복만이패 대에서 합쳐져서 청룡리 남사당패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서연호는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에서 박용태의 증언으로 덜미계열의 계보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이경화(1851~1914)최군선(1952~1917)홍덕화(1870~1939)이호경(1890~1959)오명선남운(19071979)으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계보 상 최초의 인물인 이경화의 생존연대가 문제인데, 최초의 인물이 연대가 맞지 않으면 그 이후의 인물들도 자연히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서연호는 그를 1851~1914년까지 생존한 인물로서 덜미계통의 전승자라고 하였으나, 심우성은 1900년대 초반 덧뵈기쇠 이운선의 제자이며 바우덕이의 남편으로, 1920년 경 그녀가 죽자 몇 년 후 청룡리에서 어디론가 떠난 인물이라고 하였다.

2018년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고삿반
2018년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고삿반

 

그런데 이 두 가지 기록은 우선 시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우선 청룡리 주민들의 구전대로 바우덕이가 경복궁에서 공연한 인물이라면 그보다 30살 위라고 하는 이경화는 1820년대에 태어난 셈이므로 1851~1914년까지 살았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 양도일은 생존 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바우덕이가 경복궁에서 공연하여 대원군이 손을 잡아준 사이라고 증언 하였다. 그리고 이경화와는 생전에 같이 공연활동을 한 형님으로 모시는 사이라고 하였으며, 남운용도 이경화와는 같이 활동하던 동료라고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이경화는 1920년대에도 활동을 한 인물이므로 서연호의 조사와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우성의 기록이 정확한 것도 아니다. 그의 말대로 이경화의 부인인 바우덕이가 1920년에 죽은 사람이라면 이경화는 18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양도일은 바우덕이가 경복궁에서 공연한 것을 증언하였기 때문에 30살이나 연상이라고 하는 이경화가 남편일 수 없는 노릇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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