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고교생
열여덟 고교생
  • 시사안성
  • 승인 2018.09.1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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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8
1957년 입학 후 4월 10일자로 수여된 제1학년 1반 부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양식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철필로 굵은 글씨로 긁어서 푸른색 잉크로 제작된 양식이다. 당시 교장은 안성성당 주임을 겸한 임세빈신부이다
1957년 입학 후 4월 10일자로 수여된 제1학년 1반 부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양식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철필로 굵은 글씨로 긁어서 푸른색 잉크로 제작된 양식이다. 당시 교장은 안성성당 주임을 겸한 임세빈신부이다

우리 나이로 열여덟 살이 되어 고등학교 교복을 입으니 어른이 다 된 듯 흐뭇하여 어깨를 우쭐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고교생이 되었던 때다. 거울을 보며 안고(安高)라고 쓰여 진 모표를 보느라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기도 하고 혹시 배지나 학년표시가 비뚤어지지 않았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안성천이 깨끗하게 흐르고 있는 옥천동을 출발하여 안성공원을 거쳐 비봉산 아래에 있는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시계를 괜히 들여다보며 으스대었다.

 

씩씩하게 걸어서 교문 앞에 다 왔는데 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주춤거리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바짝 긴장이 되는 순간을 맞는다. 3학년 규율부 학생들이 무서운 눈초리로 서서 복장 점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장위반으로 걸린 학생들을 교문 안쪽으로 죽 세워 놓고 일장 훈시에 들어가는 소리가 신입생 귀를 때린다.

아래 성당마당에서 3년을 보낸 중학생 시절에 겪었던 소년 마음과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들어선 운동장도 엄청 넓어보였다. 맞은편 삼덕포도원 너머 언덕까지 보이고, 오른 쪽으로는 성당건물 허리 너머로 안성시가지가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사담기에서 여러 번 거론 했지만 안법고등학교는 195131일부터 당시 안법중학교와 병설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가 입학하던 해인 1957년에는 중학교 23개 학년 6학급, 고등학교 23개 학년 6학급, 도합 12학급 7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3. 1절 가장행렬 기념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8년 3월 1일 안법고등학교 1학년 1반이 가장행렬 대회를 마치고 가두시위를 한 후 학교에 돌아와 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필자는 학생모에 한복을 입고 낫을 들어 일본인에게 저항하는 퍼포먼스를 맡았다
3. 1절 가장행렬 기념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8년 3월 1일 안법고등학교 1학년 1반이 가장행렬 대회를 마치고 가두시위를 한 후 학교에 돌아와 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필자는 학생모에 한복을 입고 낫을 들어 일본인에게 저항하는 퍼포먼스를 맡았다

1957년 열여덟 살 되던 해 48일에 입학식을 마치고 제일 먼저, 1학년 1반에 편성되어 담임 황호경(黃浩慶, 과학) 선생님을 만난다. 학년 당 2학급으로 편성되었으니 매 시간마다 바꿔 들어오는 학과 담임선생님들이 15명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학년 당시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니 국어(1) 대신 독서과목을 배웠고 고전과 국문법을 추가로 공부했으며 일반수학 보다 어려운 해석(解析), 기하(幾何)를 배웠다. 그리고 과학과목으로는 물리, 화학, 생물, 지학(地學)을 공부했으니, 과목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시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문과 이과 구분이 없으니 인문계 적성인 필자로서는 공부하기가 다소 힘들었던 것으로 회고된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9년간이나 계속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던 습성 때문인지 1학년을 마치면서 113명 중 석차 몇 등이라는 결과가 보통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우미양가’ 5단계 상대평가로 산출되는 성적에서 수, 우가 대부분인데 미술, 지학 시험과목에서 꿇었기 때문이었다.

 

안법고등학교는 매년 전통적으로 3. 1절 행사를 매년 한 번도 빼놓지 않았다. 1900년대 설립자 공안국신부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쫓기는 안성 주민을 보호해 주기도 하였고, 안성 3. 1만세운동을 지도하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3. 1 저항 정신이 전통으로 새겨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필자가 모교 교사로 근무하던 1970년대에도 신원식(루가)교장 신부님 방침으로 매년 공휴일인 31, 교직원과 전교생을 등교시켜 3. 1절 행사를 거행하였다).

195831일엔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벌인 3.1절 기념식 후에 가진 가장행렬에서 필자는 1학년 1반 퍼포먼스 팀에서 조선옷을 입고 낫을 들어 일본 순사(巡査)를 내리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사진). 가장행렬은 3학년 까지 4, 5개 팀이 참가하여 경연을 벌였으며 교내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는 교문을 나가 시가행진까지 하였다. 1학년 1반의 경연 내용은 선량한 주민들이 국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벌이던 중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체포 연행하려는 순간 낫을 비롯한 농기구를 들고 저항하는 내용으로 연출하였었다.

우등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3월 23일자로 정욱진 교장 명의로 수여된 제2학년 우등상장이다
우등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3월 23일자로 정욱진 교장 명의로 수여된 제2학년 우등상장이다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중학교 때 좋아하였던 유인식(劉仁植, 영어)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2학년 1반에 편성되었다. 수업시간에 들어가니 그동안 배우지 않던 실업가정, 국문학사(國文學史)와 제2 외국어로 독어(獨語) 과목이 추가되었다. 1학년 때 석차에 충격을 받은 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어려운 과목들이 모두 쉬워 보였다. 아마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2학년 기말고사가 쉽게 출제된 덕분에 전 과목 성적이 우수하여 학년석차 101명 중 석차 톱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과시간에 들어오는 과목 선생님들을 좋아하다 보니 수업시간 다가오는 것이 기다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공부 비결=학과 선생님을 좋아하며 믿고 따른다)

학도호국단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8년 4월 14일자로 수여된 제2학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 임명장이다. 당시 필자는 제1대대 참모를 맡아 활동하였는데 운영위원으로 호칭하였다
학도호국단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8년 4월 14일자로 수여된 제2학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 임명장이다. 당시 필자는 제1대대 참모를 맡아 활동하였는데 운영위원으로 호칭하였다

 

2학년 학년말이 되자 3학년 때 맡을 전교 학생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다행히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연대장을 별도로 두기로 하고 전교 학생위원장(학생회장)을 직선제로 뽑기로 교칙이 변경되었다. 당연히 출마하였는데 문제는 경합자가 생겼던 것이다. 일단 안법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선거 관리위원회’(위원장 한O, 2학년)가 학교 안에 꾸려졌다. 물론 학교 당국에서 생활지도 주임 선생님이 주관하는 가운데 투표용지 인쇄까지 마치게 되었다. 박종권 선거 캠프(?)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로 꾸려졌고 상대(경쟁자) 측 김O철 은 당수(태권도) 등 운동하는 친구들이 휘잡고 다니기 시작했다. 선거를 5일 쯤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연지동 우물 근처에 있는 기와집에서 정O(2학년, 현재 8회 동창회장) 학생이 경쟁자 2명을 초대(?)하였다. 가보니 부잣집 마루에는 힘이 센 친구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경쟁자를 둘 다 호출한 당사자는 당시 나이가 많아 고3 선배들과도 당당히 친구처럼 지내는 위치였다. 참석자 20여명은 모두 얌전하고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연대장을 맡고 종권이는 학생회장을 맡기로 결정되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게 된 자초지종이야기는 기회가 있을 때 말하려고 한다. 학생들을 주름 잡는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핵심은 박종권 쪽으로 단일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투표일 하루를 앞두고 출마포기가 선언되고 단독으로 나선 후보는 정식 투표를 거쳐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스무 살 당당한 청년이 되어 고3이 되었다. 존경하는 국어 선생님 이우종(李祐鍾, 시조시인 문단의 권위자)선생님 학급 3학년 1반에 편성되었다. 이상하게도 3년간 계속 1반이다. 큰 맘 먹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대학엘 가야 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갖는 순간이다.

공부하는 과목을 보니 우선 국어, 고전, 국문학사는 이우종 담임선생님 과목이라 자신 있고, 해석, 기하 둘로 나누어진 수학시간엔 새로 오신 장태진 선생님이 수업을 맡게 되었다. 대개 신임교사로 부임한 선생님은 공부시간에 이건 중요해!”하며 칠판에 쓰기 때문에 시험문제를 점치기 쉽다(*시험 비결=수업시간에 판서를 중시한다). 제일 못하는 과목이 수학이지만 기말고사에서는 답까지 외어서 우()를 받게 된다. 외국어 시험이 난관이다. 영어, 영어독본, 독일어 3과목이다. 영어는 존경하는 권병곤(權炳坤, 효명중교장 역임)선생님으로부터 수()를 받았고, 독어는 천주교수사(修士)님 과목인데 어렸을 때 천주교 미사경문에서 익힌 라틴어 발음과 같기 때문에 자신 있게 공부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일교포 북송반대궐기대회 모습(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9월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안성공원(낙원공원)에서 열린 안성군 주최 재일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필자는 ‘재일교포 북한 강제송환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왼편에서 들고 있다
재일교포 북송반대궐기대회 모습(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9월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안성공원(낙원공원)에서 열린 안성군 주최 재일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필자는 ‘재일교포 북한 강제송환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왼편에서 들고 있다

3 때인 1959년 초에는 재일교포 북송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재일교포 북송반대와 일본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개되던 시기였다. ‘1959221일 오전 서울운동장에서 각계각층 6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은 재일교포 구출에 총궐기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메시지 낭독, 결의문 채택, 유엔총회의장, 유엔사무총장,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대표, 국제적십자 대표 등에게 보내는 메시지 채택이 이루어졌다. 대회가 끝나자 참가했던 군중은 을지로와 종로 두 곳으로 나누어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서울의 상가들은 완전히 철시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검색).

안성에서도 그해 9월 초 안성공원(낙원공원)에서 군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단체와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안성군민 총궐기대회를 열고 북송반대와 일본성토대회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재일교포 북한 강제송환 결사반대”, “일본의 친공정책을 분쇄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가하였다(사진). 시위에 나선 시가행진에서는 궐기대회 참가단체 중 안법악대를 선두로 단체장, 안법학생, 농고학생, 참가 군민 순서로 행진하면서 가두 시민들의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3때 3총사 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5월 고교재학시절 3총사를 만들어 우정(友情)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 창전동에 있는 안성사진관에 직접 가서 찍은 사진이다. 안성 역사책 ‘안성문화 금석관(今昔觀)’을 쓴 바 있는 추수(秋水) 김태영 선생에 의하면 1927년에 최명호가 개업한 안성사진관이 1960년대에도 신축 건물에서 성업 중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3때 3총사 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5월 고교재학시절 3총사를 만들어 우정(友情)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 창전동에 있는 안성사진관에 직접 가서 찍은 사진이다. 안성 역사책 ‘안성문화 금석관(今昔觀)’을 쓴 바 있는 추수(秋水) 김태영 선생에 의하면 1927년에 최명호가 개업한 안성사진관이 1960년대에도 신축 건물에서 성업 중이라는 기록이 있다
멋진 포즈/표정 쓰기(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10월 고3때 졸업을 앞두고 추억을 남기고자 의기투합한 친구들 6명이 안성사진관에 모여서 서로 옷을 바꿔 입고 촬영하였다
멋진 포즈/표정 쓰기(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9년 10월 고3때 졸업을 앞두고 추억을 남기고자 의기투합한 친구들 6명이 안성사진관에 모여서 서로 옷을 바꿔 입고 촬영하였다

 

3 졸업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대학 진학 상담과 원서작성에 들어가는 긴장된 시간이 다가왔다. 당시에도 대학 입학원서를 쓰려면 생활기록부에 있는 취미 또는 특기, 적성, 학생의 희망, 부형의 희망을 참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3학년 140번 박종권은 1학년, 2학년, 3학년 기록 란에 선직(選職=법관) 선교(選校=법대) 부모희망(법관) 기록이 3년간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법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3 담임 이우종 선생님과 권병곤 교감선생님 두 분이 상의해 가며 추천서를 작성하였고 담임선생님이 직접 서울로 올라가 원서를 접수시켰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당시 고대엔 상대와 법대 두 명이 희망하여 구술시험과 면접시험에 합격하였다).

고3 졸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법고등학교 3년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정욱진 교장 명의로 1960년 3월 20일 받은 졸업증서이다
고3 졸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법고등학교 3년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정욱진 교장 명의로 1960년 3월 20일 받은 졸업증서이다

 

사담기에서 사실대로 증언하기 위하여 며칠 전 안법고에 들러 생활기록부 사본을 떼어 보았다. 3년간의 생활기록부 사본이 대학에 그대로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직업 보도(輔導)상황 란엔 직업 적성과 희망사항과 지도사항이 기록되어 있었고, 행동발달상황 란엔 자주성, 정의감 등 10개 사항이 3년간 평가되어 있었고, 정서의 경향(안정감, 심미감, 명랑성)과 판단의 경향(공정성, 신중성)에 대하여 놀랍게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졸업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60년 2월 24일 안법고등학교 제 8회 졸업사진이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7번째가 정욱진 교장신부이고 그 옆에 있는 사제는 재단인 천주교 수원교구청 총대리인 정덕진 신부(정욱진 교장신부 동생)가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이다
졸업사진(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60년 2월 24일 안법고등학교 제 8회 졸업사진이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7번째가 정욱진 교장신부이고 그 옆에 있는 사제는 재단인 천주교 수원교구청 총대리인 정덕진 신부(정욱진 교장신부 동생)가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이다

요즘 언론 기사에서는 인생 출발의 기점이 마치 성적위주에 있다는 입시정책 때문에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대학 수시모집과 정시모집에서 학교시험 관리, 성적산출의 공정성과 당락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생활기록부 작성에서 신뢰성을 의심케 하는 사례들과 범법요소들이 노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육인의 한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흔히 교실붕괴, 학교붕괴의 원인이 학생들에게 있는 듯이 청소년 정책과 교육정책을 다루고 있는 현실 정치에서 학교 당국과 교사들에게도 포카스를 맞추어 볼 필요성이 대두된다는 생각을 한번 가져 본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입시 지옥이 아니라 입시 천국을 맞보게 해 줄 어른들의 정치를 기대해 본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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