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면장은 참 잘하는군”- 매일신보 1912년 5월 기사(2)
“그런 면장은 참 잘하는군”- 매일신보 1912년 5월 기사(2)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9.0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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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17
매일신보 1912년 5월 23일 3면3단, 똑같은 기사가 이틀뒤인 25일에도 게대된다
매일신보 1912년 5월 23일 3면3단, 똑같은 기사가 이틀뒤인 25일에도 게대된다

191252333- 道一面長惜去, 그런면장은 참 잘하는군

양성군 도일면(陽城郡 道一面) 면장 ○○○씨는 면쟝을 피임한지 오륙년에 면내 제반사무를 근간행공하며, 몽매한 인민을 간절히 권유하야 신법령에 범치안케하고, 금년도에는 본사신보(本社申報)를 청구하야 면내 십여동리를 구람케하고 신문대금은 자긔가 담당함으로, 면내인민이 모다 면장의 열셩을 감복하더니, 근일에 무삼 사고를 인함인지, 신병이 잇다하고 면장의 임무를 고샤하야 청원의면한고로 면내 인민이 원류신청셔를 여러번 뎨출하야 부형을 일은것갓치 애셕한다더라.

 

업무를 잘하고 매일신보를 자부담으로 구입해 동네에 나누어 주던 도일면 ○○○면장이 신병이 있다면서 면장직을 내놓아 주민들이 애석해 한다는 기사다.

기사에 의하면 ○○○면장은 대한제국시절 임명된 면장으로 보이고 신법령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기사와 글자하나 틀리지 않은 기사가 525일 똑같은 33단에 다시 실리는데 단순한 착오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다음호에 소개하겠지만 61일 기사에는 역시 매일신보를 자부담으로 구입한 거곡면장을 칭찬하는 기사가 나온다. 당시 일제와 매일신보가 신문 보급확대를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성군 도일면은 현재의 공도읍 용두리와 승두리 일대다.본문에 지금은 쓰지 않고 당시에도 안쓰이던 아래 아가 많이 들어간 점이 특이하다

매일신보 1912년 5월25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2년 5월25일 2면 5단

191252525測量標不可毁

度支部內 임시 토지조사국에서는 양지, 이천, 양평, 여주, 음죽, 안성, 양성, 남양 등 8군에 측량표를 설립한 로 경기도청에 대하여 통지가 該廳에서는 右陳 각 군수에게 申飭고 측량표를 설립한 구역내의 일반인민으로 하여금 각자 번신하야 훼손치 안이케 지휘하라 하얏다더라.

 

탁지부(度支部)는 대한제국 시절 탁지아문(度支衙門)을 개칭한 것으로, 정부의 재무를 총괄하던 중앙관청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한후에도 대한제국시절의 행정조직을 당장 바꾸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사는 탁지부의 토지조사국에서 토지조사를 위해 설치한 측량표를 설치한 것과 관련해 경기도청에서 각 군수에게 주민들이 훼손치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토지조사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고 측량표등이 훼손되는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12년 5월 30일 2면 7단
매일신보 1912년 5월 30일 2면 7단

191253027蠶箔貸付

본도 관내 인천, 양천, 양성, 교동을 각부군의 공동양잠조합에 대하야 잠박 포도를 대부하고 잠업을 장려한다더라.

 

경기도가 잠업에 필요한 물품까지 빌려주면서 잠업을 장려한다는 기사다. 전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잠업장려가 일본의 방적업 등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도였고, 그결과 조선의 민중은 다른 작물의 재배면적이 줄어들어 고통을 받았다.

매일신보 1912년 5월 30일 2면 8단
매일신보 1912년 5월 30일 2면 8단

191253028단 인사소식

八島 學務係 書記 : 경기도 學務係 八島 書記는 시흥, 인천, 안산, 남양, 수원, 오산, 진위, 평택, 양성, 안성, 죽산, 음죽, 여주, 이천, 양지 등 군의 公立尋常小學校狀態視察하기 위하야 63일에 該 地方으로 出張

 

경기도 학무계 서기가 공립심상소학교의 상태를 시찰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출장을 떠났다는 기사다.

그런데 공립 심상소학교라고 하는 것은 초등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초등학교. 일제강점기에는 1905년부터 1937년까지는 일본인만 다닐 수 있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1938) 제정 이후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 명칭도 심상소학교로 바뀌었다. 바뀌기 전 한국인이 다니던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보통학교였다.

안성기략(1925)에는 안성의 공립심상소학교의 연혁이 비료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성기략에 의하면 1909521일 안성에 거류하던 일본인 학부형 23명이 경비를 지원해 안성보통학교 창고를 빌려 교사로 정하고 개교했고, 당시 학생수는 5명이었다. 이후 명칭변경이 있었고 191241일 안성공립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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