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계보의 문제 Ⅰ
남사당패 계보의 문제 Ⅰ
  • 시사안성
  • 승인 2018.09.0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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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10
1968년 2월 17일 「동아일보」
1968년 2월 17일 「동아일보」

사당패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에 모두 사라져, 그 계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므로 남사당패의 계보를 추적하여 사당패의 경로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남사당패의 계보를 살펴보면 이합집산이 상당히 심하여, 1900년대 초반기 남사당패에 관한 확실한 계보를 찾기는 어렵다. 대체로 남사당패연구에서 말한 1900년대 초 원각사에서 공연했다는 탈꾼 이운선에서 시작했다는 설과 청룡리 주민 및 남사당 후예로부터 구전된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에 참가했다는 설, 그리고 서연호가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에서 밝힌 이경화가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는 설 등 세 가지 계보가 있다.

1920~30년대 후반에 활동한 인물은 남운용, 양도일, 정일파, 최성구, 송순갑 등 대부분 청룡리를 거쳐 갔던 사람들로서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세 가지 설 모두에 인연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생존 당시 인터뷰 등을 재구성하여 남사당패의 활동과 계보를 확인하고자 한다.

남운용은 1968년 신동아 기고문에 남사당이 해체될 무렵인 1927년 전국에 15개의 남사당패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솟대쟁이패 출신 송순갑은 본인이 <이우문패>에 들어간 1922년 무렵 세 개의 남사당패와 하나의 솟대쟁이패가 있었다고 하였다. 같은 청룡리 출신인 이 둘의 증언이 다른데 이는 아마도 남운용이 말한 15개의 패는 남사당패뿐 아니라 걸립패까지 포함한 숫자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굿중패, 답교패, 걸립패 등 다른 놀이패를 남사당패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15개의 패가 있다고 하기에는 계보가 확실치 않고, 또한 숫자가 너무 많을 뿐더러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7년 무렵이라고 한 남사당패의 해체 시기도 같이 활동한 양도일이 말한 1930년대와는 차이가 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920년대에 남사당패가 몇 개 있었는지, 언제 사라졌는지 등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솟대쟁이 같은 놀이패 광대들 나아가 남사당 단원들마저 남사당의 정의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람들은 특히 굿중패와 남사당패를 자주 혼동하였는데, 1968동아일보에는 남사당 덧뵈기쇠 양도일을 소개하며 청룡리 바우덕이패를 굿중패로 소개할 정도였다. 또 양도일은 당시 인터뷰에서 옷 잘 입고 춤 잘 추는 굿중패에 홀려 집을 도망 나와 남사당패를 따라다녔다고 하여 남사당패와 굿중패를 아예 같은 집단으로 취급하였다. 또 고수(鼓手)로 이름이 높은 한성준도 굿중패를 거의 남사당패와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당시 같은 기사를 취재하던 경향신문역시 남사당과 굿중패를 크게 구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동아일보와 제보자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굿중패-기산풍속도
굿중패-기산풍속도
사당판놀음-기산풍속도
사당판놀음-기산풍속도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기산풍속도를 유심히 보면 굿중패와 사당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난호에 소개한 사당패의 그림과 이번에 소개하는 굿중패를 비교해 보자. 주위에서 고갈을 쓴 남자가 북과 괭과리를 치고 춤을 추고 있고, 한편에는 남자가 여자를 무동 태우고 무동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굿중패이다.

반면 사당패는 거사가 소고를 두드리고 사당이 춤을 추고 있다. 따라서 굿중패는 대부분의 연희자가 남자들이고, 사당패는 남녀가 비슷한 숫자를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무동을 태우는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되지만 전반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이러한 두 단체 간의 유사점으로 말미암아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 전환된 시점에는 남자들이 주 연희자가 되므로 남사당패와 굿중패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굿중패의 연희자가 대부분 남자인 것처럼 사당패에서 전환된 남사당패도 대부분의 구성원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사당패 시절에는 여자인 사당이 많았으므로 구별이 쉬웠지만 남사당패에서는 구성원이 대부분 남자이므로 굿중패와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굿중패는 사당이 거사 위에서 무동춤을 추는 것과 북을 두드리는 것만이 다르지 전반적인 구성원이나 복장이 사당패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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