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부터 중학교 다니던 시절
열다섯 살부터 중학교 다니던 시절
  • 시사안성
  • 승인 2018.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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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7
안법중학교 입학사진, 14.9x11.1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4년 5월 10일 안법중학교 1학년 을반 담임 김영기 선생님과 반 학생들 입학 기념사진이다. 현 안법고등학교 교정에 신축 중인 본관 건물 앞에서 찍었다. 신축중인 건물엔 유리창문이 보이질 않는다.(필자는 맨 앞 줄 왼쪽에서 네 번째 학생)
안법중학교 입학사진, 14.9x11.1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4년 5월 10일 안법중학교 1학년 을반 담임 김영기 선생님과 반 학생들 입학 기념사진이다. 현 안법고등학교 교정에 신축 중인 본관 건물 앞에서 찍었다. 신축중인 건물엔 유리창문이 보이질 않는다.(필자는 맨 앞 줄 왼쪽에서 네 번째 학생)

 

안법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열다섯 살 되던 1954년 안법중학교 새내기 학생으로 입학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안중(安中)’이란 모표가 달린 흰 테를 두 번 두른(마치 서울 휘문중 교모처럼) 학생 모자를 쓰고 다니면 모표를 쳐다보면서 상당히 궁금한 표정들이다.

안성중(安城中)인가요?” “아 아닙니다. 안법중(安法中)입니다.”

법자가 무슨 법자인가요?” (아주 똑똑하다는 듯이) “자 인데요!”

불교학교인가요?” “아니요, 천주교 학교이에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학교 이름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필자가 모교에 재직 중 교직원 여행 시에는 安法이란 글자를 넣은 등산모자를 단체로 쓰고 경주 쪽으로 갔을 때에는 법원에서 나오셨나요?”라는 인사도 받았다. 한번은 속리산으로 여행을 갔더니 역시 '천안지법(天安地法)'에서 소풍 오셨느냐는 질문을 받은 바도 있다.

현재는 안법학교라는 이름이 꽤 많이 알려져 있다고 생각된다. 옛날 공()신부 때의 초등과정인 안법학교라는 이름은 잊혀 져 있어도 초창기 안법초급중학교로 시작한 안법중학교시대를 거쳐,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가톨릭계 안법고등학교로서 한 때 대학 예비고사 전국 인문계 수석을 배출한 이후 명문고등학교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통지표(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954년 안법중학교 제 1학년 을반 학생의 성적통지표 표지이다

 

안법중학교 탄생 전 후의 역사를 안법 100년사에서 찾아보았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탄압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던 안법국민학교19455월 서울 약현 성당 신부이면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김재근(金滓根, 토마스)신부가 안성성당 주임신부 겸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의무교육으로 추진됨에 따라 폐교 위기에 있던 초등학교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중학교로 승격시킬 것을 결심하게 된다.

한국은 19459월부터 3년간의 미 군정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교육정책은 기본적으로 한국교육의 민주화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전체주의적인 교육체계에서 민주주의 교육체계로 전환함으로써 한국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우등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3월 25일자로 수여된 1학년 때의 우등상장이다. 인쇄소에 의뢰했는지 세로로 깔끔하게 작성되었고 이름만 붓글씨로 작성되었다
우등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3월 25일자로 수여된 1학년 때의 우등상장이다. 인쇄소에 의뢰했는지 세로로 깔끔하게 작성되었고 이름만 붓글씨로 작성되었다

드디어 194741안법초급중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김재근신부는 연초에 부임한 조원유(趙源裕/윤리,교리)선생님과 함께 중학교 승격과 학교체제를 갖추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같은 해 7월엔 이달섭(李達燮,과학) 목해균(睦海均,국어) 유인식(劉仁植,영어)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중학교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히 조원유선생님은 교모, 교표와 배지를 도안하였다고 한다. 초창기 교감은 김정한(金正漢)선생님이 부임하였고 추후 안성 교육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19506월 권병곤(權炳坤)선생님이 부임하게 되었다.

초창기 중학교 개교 당시에는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19506. 25전쟁이 시작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는 그 후 고등학교를 병설로 설립하게 되면서 더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1951년 부터는 안법중고등학교병설로 운영하게 되었다. ‘안법중학교는 개교 당시 학년별 2학급으로 학칙인가를 받아 시작하였으나 1956년부터는 학년별 4학급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규모를 키우게 된다.

임명장 19.7x27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6월 1일 임명된 중학교 2학년 갑반 부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철필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내어 만든 임명장 양식을 볼 수 있다
임명장 19.7x27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6월 1일 임명된 중학교 2학년 갑반 부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철필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내어 만든 임명장 양식을 볼 수 있다

 

필자는 19544월에 안법중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어 1학년 을()반 담임 김영기선생님 반에 소속하게 된다. 그 때는 신입생(2학급) 120명을 입학성적 1등부터 60등까지는 을(), 61등부터 120등 까지는 갑()반으로 하여 우열반을 편성하였던 것이다. 갑반이 우수 반이어야 하는데 어찌해서 을반을 우수반으로 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다음해엔 갑반을 우수반으로 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입학성적 1등으로 들어 온 이O원 친구(2학년 때에는 서울 경복중 전학)가 우리 반, 을 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어서 당시에 우수 반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1955년부터 연차적으로 국정교과서의 개편 또는 신규 편찬에 착수하여 겨우 초..고등학교의 교과서가 완료되던 시기였다.

표창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9월 6일자로 수여된 2학년 여름방학 과제 성적(가작) 표창장이다. 학교에서 상장용지를 사다가 붓글씨로 직접 써서 제작한 상장 양식을 볼 수 있다
표창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5년 9월 6일자로 수여된 2학년 여름방학 과제 성적(가작) 표창장이다. 학교에서 상장용지를 사다가 붓글씨로 직접 써서 제작한 상장 양식을 볼 수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선생님은 김영기(실과) 담임선생님이지만 은사님 중에서는 중학교 재학 시절 3년 동안 지도해 주셨던 권병곤 교감선생님과 이춘택(역사)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또한 서울 경복중학교에서 전임한 이경복(수학)선생님 김승환(음악)선생님 정완모(과학)선생님과 재미있으면서 무섭게 영어를 가르쳐주시던 유인식(영어, 안법 밴드부 창설자) 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영어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벌벌 떨기부터 시작한다. 우선 영어로 질문하고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 회화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머리가 지끈할 정도의 군밤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잘하는 사람, 또 한 번은 못하는 사람을 골라가며 시키기 때문에 딴 전을 피울 수가 없다. 촌에서 학교 다니는 이OO 친구는 매시간 마다 안 맞는 날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은 영어책을 읽다가 또 걸렸던 것 같다. This is a persimmon. 문장에서 [퍼 시먼] 발음이 안 되는지 [버 시먼]으로 해버렸던 것 같다. 선생님이 따라해 보라면서 퍼 시먼하면 역시 버 시먼하고 대답하는 순간 학생들은 일제히 까르르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던 것이다. 학생들은 그 발음이 벗으면이라고 들었던 것이다. 역시 선생님도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이 놈아 벗으면 뭐가 나와!!”하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시는 바람에 순간 바지춤을 꼭 쥐고 긴장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이 실화는 동창회 때 마다 모이기만 하면 다반사로 꺼내게 된다. 그 친구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덕분에 국립대학 기계공학과 교수가 되었지 않나?” 하며 앞에 있는 친구에게 술잔을 권하곤 하는 풍경이 만났을 때 마다 안주거리로 펼쳐진다.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6년 4월 17일자로 임명된 중학교 3학년 2반 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상장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굵은 글씨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제작한 임명장이다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6년 4월 17일자로 임명된 중학교 3학년 2반 반장 임명장이다. 인쇄된 상장이 아니라 등사용지에 굵은 글씨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제작한 임명장이다

 

다음 해인 1955년엔 2학년 갑반 황호경(과학) 담임선생님 반으로 소속되었다. 턱 수염이 많이 나시는 지 매번 면도한 자리가 파란색으로 변해 있는 멋쟁이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유난히도 엄하면서도 필자를 예뻐해 주었던 기억이다. 김문일(국어) 선생님은 매번 약간 검게 보이는 색안경을 늘 쓰고 계셨다. 색안경 안쪽에 감추어져 있는 눈을 보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무슨 질문을 하실까 봐서 매번 실패하곤 하였다.

2학년 때에는 학교 교실 위편에 있는 성당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신자학생 지도교사 이춘택선생님은 내게 신자학생 반장이란 감투를 주어서 신자학생들의 소집을 책임지게 하였다. 말 안 듣는 2학년이어서 그런지 밴둥거리면서 잘 모이지 않는 날이면 죄 없는 반장이 엎드려뻗쳐로 기합을 받게 된다. 당시 복사(服事)대장을 맡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이한택(현 의정부교구 원로 주교) 선배가 가르치는 중학교 복사반(服事班)을 열심히 해서 그레고리안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기합이 무서워지질 않았다.

열심히 충성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춘택(*이한택 주교의 형님)선생님의 역사 과목은 상당히 어려워서 쩔쩔 매었다는 기억을 떨칠 수가 없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A3용지 정도의 커다란 시험지 한 장씩을 나누어주고 나서, 칠판에 <OOO에 대하여 쓰시오>라는 논술 형 시험문제 2개 문항 제시하는 형태의 시험 방식이었다. 시험지를 받은 학생들은 순간 명상에 들어간다. 잠시 동안 모두 멍 때리는 순간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개근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거행된 졸업식에서 수여된 중학교 3개년 개근상장이다
개근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거행된 졸업식에서 수여된 중학교 3개년 개근상장이다

 

중학교 다니는 동안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음악, 영어였던 생각이 난다. 국어 선생님은 항상 진지한 모습으로 학생들을 문학 작품(스토리텔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교수법이었고 음악시간엔 산타루치아와 같은 명곡을 가르쳐주시며 이탈리아 성악가를 소개하며 흥미를 돋았다. 또한 영어 선생님은 나에게 제일 먼저 영어책을 읽게 하며 너는 목소리가 참 좋구나라는 칭찬을 항상 들었기 때문이다.

수학과목은 아주 싫어했고 과학시간도 재미없어 했으나 여름방학 숙제로 내어준 생물채집을 잘해가서 상을 받은 이후에 겨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당시 옥천교아래 하천이나 웅덩이에는 유난히도 잠자리가 많았는데 주로 잠자리 곤충채집을 작품으로 해서 제출하였다. 철사를 동그랗게 만들어 막대기에 붙들어 맨 잠자리채에 거미줄을 겹겹이 묻혀서 풀이나 나무위에 앉은 잠자리를 쓸어 잡는 방식으로 채집하였던 생각이 난다. 당시 공중에 높이 날라서 잘 잡히지 않는 왕잠자리를 어렵게 유인해서 채집 박스에 정성들여 만든 작품을 제출하였기 때문에 상을 탔던 것 같다.

표창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졸업식 때 수여된 공로표창장이다. 졸업 당시 학급 반장이면서 중학교까지 편성된 학도호국단 간부학생의 공로로 수여 받았다. 상장 용지를 학교에서 사다가 멋있는 서예 필체로 직접 작성하여 만들어 수여하였다
표창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졸업식 때 수여된 공로표창장이다. 졸업 당시 학급 반장이면서 중학교까지 편성된 학도호국단 간부학생의 공로로 수여 받았다. 상장 용지를 학교에서 사다가 멋있는 서예 필체로 직접 작성하여 만들어 수여하였다

 

당시엔 중학교부터 학도호국단이 편성되어 있어서 월요일 조회 때 의식 행렬에서 발목에 두르는 각반(脚絆)을 소지하지 않았을 때엔 아주 힘든 기합을 받았다. 그래도 2대대(중학교 편성) 간부학생이나 규율부 학생들은 학교 교무실에 보관되어 있는 어깨 가죽 끈으로 연결된 허리 벨트를 꺼내어 간부학생 지위가 수놓아진 완장과 함께 몸에 찰 수 있었다.

필자는 중학교로 편성된 안법연대 제 2대대 간부학생으로 임명되어 사열(査閱)이나 분열(分列)시에 항상 선두에 서서 씩씩하게 행진하며 뻐기기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임세빈 교장신부님은 육군 군종신부(대위) 출신이어서 학생들이 사열식 때 복장단정이나 차려 자세가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을 시에는 발로 걷어차기도 하였기 때문에 벌벌 떨면서 대단히 긴장했던 순간이었다.

안성성당 주임신부이기도 한 임세빈(요셉)신부님은 사냥에 취미와 특기를 가지고 있었던 분이기 때문에 사냥총을 어깨에 메고 미사 복사 한 두 명을 지프차에 태워서 포인타라는 사냥개와 함께 꿩 사냥을 수시로 나갔었다. 그러나 나는 지프차에 타도록 뽑힌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많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성당 사제관에서 망원경으로 비봉산 쪽을 주시하다가 바로 사냥개만 데리고 올라가 금방 꿩 두세 마리를 잡아 내려오는 모습을 가끔 본 기억이 난다. 겨울철에는 눈이 하얗게 덮인 비봉산을 올려다보면 산토끼들이 막 뛰어다니는 모습이 어렴풋이 멀리 보이기도 하였으나 임신부님은 땅에 기어 다니는 짐승은 잡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봄 방학에 들어갔던 때 도기동 쪽에 있는 철교에 올라가 놀던 기억은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는다. 지금의 안성경찰서에서 중앙대 후문 쪽으로 흐르는 안성천을 가로 지르는 끊긴 철교가 짧은 길이로 남아있었다. 살던 옥천동 집에서 가깝기도 한 끊긴 철로에서는 당시 어린이들이 더러 올라가 놀던 위험한 놀이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졸업식에서 안법중학교장 임세빈(林世彬)신부로부터 수여된 졸업장(제 855호)이다
졸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7년 3월 15일 졸업식에서 안법중학교장 임세빈(林世彬)신부로부터 수여된 졸업장(제 855호)이다

 

당시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A4 용지에 그림을 곁들여서 만든 싸인(sign)지를 우정으로 서로 교환하던 때가 있었다. 샘이 많아서인지 학급을 돌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한 장이라도 더 받으려고 다른 반 친구 집을 서로 방문 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다른 반 친구 몇 명이 집에 놀러왔다. 어머니가 차디 찬 샘물을 퍼서 간장을 타서 나누어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안성교 쪽으로 걷다가 도기동 건너편으로 향하여 갑자기 끊긴 철도 다리가 생각나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멀리서 쳐다보니 작은 꼬마 몇 명이 마치 곡예를 하듯 다리 위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다 같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어떤 꼬마들은 겁이 나는지 엉금엉금 바닥에 깔린 침목을 집고 기어서 가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도 침목이 깔린 철교위로 올라갔다. 몇 발작을 디뎠는지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순간 밑을 내려다보았더니 무서운 생각이 더 들었다. 눈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렸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우선 침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얼마동안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밑으로 뛰어 내렸다. !! 소리에 모두들 놀라 그 쪽으로 달려오고, 위에서 철로를 걷던 아이들은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하는지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아마 한 시간쯤 후에 건너편에 도착하였다고 들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고 오른 쪽 발목을 살짝 삐는 부상만 입었다. 61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대체 3m가 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두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믿을 뿐이다.

되돌아보니 사실 젊은 시절, 정상에 오르는 동안에는 앞에 있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같은 경쟁자를 축복하기는커녕 외면하기도 했던 기억이다. 원로가 되다보니 요즘엔 앞에 있는 사람이 아주 잘 보인다. 웃으면서 제자나 후배에게도 먼저 다가가 존댓말을 하며 인사한다.

중 3때의 필자 모습(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6년도 안법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옥천동 앞집에 사는 안성중 3 류O형 학생과 창전동 안성사진관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시 안법중학교(사립)와 안성중학교(공립)의 교복, 모자, 모표, 명찰, 배지, 학년표지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중 3때의 필자 모습(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6년도 안법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옥천동 앞집에 사는 안성중 3 류O형 학생과 창전동 안성사진관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시 안법중학교(사립)와 안성중학교(공립)의 교복, 모자, 모표, 명찰, 배지, 학년표지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안성성당 공베르 노인대학이 2학기 개학을 하였다. 매주 목요일 마다 노인대학 학생이 되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요즘, 안성성당 옛날 수녀원 자리에 있던 중학교 교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문화재 성당 뒤뜰에 있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열심히 걷기도 한다.

9월말이면 4억 원 공사 안성성당 박물관(100주년 기념관) 리모델링이 끝나고 안성시 시티투어 코스에 들어가 있는 성지순례 객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옛 날 중학교 운동장이었던 성당 마당에서 만나는 유치원 원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100주년 기념성전으로 올라가면서 광장 입구에 놓여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십자가상에서 내려온 예수의 시신을 어머니 마리아가 안고 있는 석고상의 모형)앞에서 잠시 묵상하고 성당으로 올라가 노인대학 교실로 들어간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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