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묵언
침묵과 묵언
  • 시사안성
  • 승인 2022.05.2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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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량 교수의 노래하는 인문학
필자 정경량

언젠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갑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버스 좌석에 지갑을 떨어뜨린 것 같아 먼저 고속버스 사무실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돌아와서는 침묵과 묵언이요?”라고 묻는다. 그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지갑은 열었을 때 침묵과 묵언이라는 문구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좌우명처럼 지갑 안에 이 문구를 써넣은 것은 몇 년 전이다. 나이가 들면서 변화되는 것 중 하나는 아마도 말이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경우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젊었을 때 나는 강연에서나 생활에서 비교적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든 후에는 강연할 때 불필요한 내용의 말을 많이 한다고 아내가 지적한다. 나도 모르게 변화된 것일까? 아무튼 언제부턴가 나는 강연을 할 때나 유튜브 영상 작업을 할 때, 꼭 필요한 내용의 말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6,7년 전 은퇴를 앞두고 거의 침묵과 묵언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성대결절 때문이었다. 여러 날에 걸쳐 과도하게 노래하다가 그만 목에 무리가 가서 성대에 문제가 생겼다. 그 전에도 노래하는 열정이 지나쳐서 가끔 목이 쉰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그저 며칠 노래를 안하고 지내면 목소리가 회복되곤 했다. 그런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1,2주일이 지났는데도 가성 발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상태를 점검하려면 나는 요들송 노래를 불러보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보았더니 의사가 성대결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것은 대부분 전문 가수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인데, 성대가 완전히 닫혀 지지 않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내 노래 목소리에 이상이 생긴 이유를 그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송창식 가수도 성대결절을 겪었다고 한다.

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수술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최대한 침묵과 묵언으로 낫도록 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수술을 피해 살아왔던 나이기에, 침묵과 묵언을 선택했다. 은퇴기념으로 <3회 독주회>를 열 예정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혀놓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대전 KBS 텔레비전 생방송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공표한 것이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공연은 어쩔 수 없이 취소하고 나중에 하면 되는 것이렷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되돌아오지 않으면... 평생 노래하며 살려 했는데, 좋은 목소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이어지자 점점 더 침울해졌다. 지나치게 큰 소리로 연일 노래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자책을 하게 되었다. 나의 원래 목소리를 되찾고 싶은 심정이 너무나도 간절하였다.

오직 할 수 있는 방법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최대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었다. 내 평생에 그때처럼 노래는커녕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시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낸 6개월 후,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병원을 찾았다. 긴장하면서 진찰하는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의사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 나았다고 말했다.

다시 노래할 수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 후로는 노래할 때 결코 목을 무리하게 쓰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노래도 훨씬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아마도 성대결절 경험을 통해 나만의 발성법을 체득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노래할 때 나는 그저 바람이 내 성대를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한다고...

한때 좋지 않았던 경험이 훗날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가. 성대결절 이후 노래에 대한 나의 자세가 사뭇 달라졌다. 오랫동안 노래하려면, 지나치지 않게 중용을 지키면서 건강한 생활을 잘 유지해야한다. 이제 노래에 대한 나의 소망은 이렇다: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노래하다가 죽는 것...

 

 

정경량(노래하는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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