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의 분포와 안성 청룡사 Ⅱ
사당패의 분포와 안성 청룡사 Ⅱ
  • 시사안성
  • 승인 2018.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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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9
덧뵈기 - 2006년 남사당 전수관
덧뵈기 - 2006년 남사당 전수관

 

장쇠 : 야 이 사람들 우리가 이곳에 나올 때는 싸우러 나왔겠나, 저 먹뱅이(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근동지명) 남사당패 한번 눌러 보려는 게 아녀!

--------------중략----------

꺽쇠 : 이만허면 먹뱅이, 남사당 쪽두 못쓰것다.

 

위 사설은 심우성이 채록한 남사당 덧뵈기 각본인데, 이 사설을 하는 남사당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대사에 나오는 먹뱅이남사당과는 또 다른 남사당패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대사를 하는 사람들도 남사당패인데 다른 남사당패인 먹뱅이 남사당패의 기세를 누르려고 하며, “이만하면 먹뱅이 남사당 쪽도 못 쓰겠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먹뱅이 남사당패보다 자기네들이 더 우월한 남사당패인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우성이 채록한 당시 남사당은 남운용, 양도일을 비롯한 최성구 등 대부분이 청룡리 출신이기 때문에 청룡리 남사당이 먹뱅이 남사당을 실력으로 누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성 지명을 살펴보면 먹뱅이라고 하는 곳은 서운면 청룡리 근처가 아니라 금광면 금광리이다. 즉 청룡리 남사당이 금광면의 먹뱅이 남사당을 누른다는 뜻은 청룡리 남사당과는 다른 먹뱅이 남사당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첫째 채록자인 심우성이 먹뱅이를 청룡리 근동으로 해제를 잘못했을 가능성, 둘째 금광면 먹뱅이에 청룡리 남사당과는 또 다른 남사당패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 마지막으로 청룡리 남사당이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남사당패를 내세워 대결 구도를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1930년대 산대놀이 가면과 옷
1930년대 산대놀이 가면과 옷

 

세 가지 이유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가상의 남사당패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청룡리 남사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선거리 10내외의 지역에 현실적으로 다른 남사당이 존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주변에 청룡리 남사당이라고 하는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남사당이 있음에도 같은 안성 지역에 또 다른 남사당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당시 남사당패의 행태로 봐서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안성은 가상의 남사당패를 만들어 낼 정도로 남사당패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 사당패의 근거지가 경기도에는 안성 청룡리 한 곳 만이었고 대부분 전라도와 경상도에 분포하였는데, 1930년대 남사당패의 근거지를 보면 황해도를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없어지고 안성, 평택 등 안성 인근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실제 남사당패들의 행동 유형과는 괴리가 있다. 왜냐하면 남사당패들은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어느 정도 지역적 분할을 하고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안성 인근에 많은 남사당패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남운용은 1968년 신동아 7월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男寺黨 行衆들 끼리는 서로 경쟁심 같은 것이 없어 퍽 사이가 좋게 지냈다. 어느 마을이나 공연하러 찾아갔을 때 만일 그곳에서 1백리 이내에 다른 行衆이 와 있으면 風便에 소식을 듣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차에 같은 마을에 잇따라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어쩌다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면 하루나 이틀 동안 함께 공연하면서 친한 사이끼리 따로 술도 마시고 놀러 다니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곤 했다.

 

이와 같이 남사당패들은 자기네끼리는 경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경쟁관계였다면 대다수의 남사당패들이 전국에서 안성 인근으로 모여들 때 심각한 경쟁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전국의 남사당패들이 사당패 시절부터 청룡리를 중심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청룡사에서 사당을 양성하여 전국으로 보낸 것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청룡리가 원 뿌리인 전국의 사당패들 간에는 동료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인정하며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지역적 관할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사당패들이 1920~30년대 남사당패 시대에 들어서는 급격히 안성 주위로의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1백리 이내에 다른 패가 와 있으면 소문만 듣더라도 피해 다녔다고 하는 남사당패들이 안성과 평택처럼 1백리 이내에 근거지가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사당 줄타기- 2006년 어름쇠 박진아
남사당 줄타기- 2006년 어름쇠 박진아

이는 바로 안성 청룡사가 전국 사당패의 근원지 중 가장 유명한 총본산으로, 사당패들을 길러 전국에 보급 할 정도로 가장 대표적인 사당패의 근거지였으므로 그 직계 후예인 남사당패에 들어서도 그 명성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안성 청룡리 사당패의 유명세에 힘입어 한번이라도 청룡리에 몸담았던 사람은 주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새로운 연희패를 만들 경우에도 연희자들을 모으기 쉬웠을 것이다.

때문에 1920~30년대 전국에 퍼져있던 모든 남사당패들이 안성 인근으로 집결하였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안성은 안성평야를 끼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라고 하는 안성장이 있어 물자가 풍족하였고, 예로부터 예인들을 우대해 주는 풍속도 안성 인근으로의 집결에 한 몫 하였을 것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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