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다
  • 시사안성
  • 승인 2018.08.0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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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3
덕봉리 마을전경
덕봉리 마을전경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탈취한 것은 경술국치(한일합방 1910, 순종 4)이나 그 이전 을사늑약(1905, 고종9)부터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 하였다.

이때 지식인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 등 무력 투쟁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일제에 비협조하며 관직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두문불출하며 울분을 삼키기도 하였다.

또 일부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국력을 길러 일제를 축출하고 국권을 되찾고자 교육,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원(宗員)들 중에는 일제에 항거한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살펴본다.

오명근(吳明根)과 오형근(吳衡根), 오정근(吳正根)은 일제에 비협조하며 관직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항거한 인물이고 오진영(吳震泳)은 후진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국권회복을 추구한 인물이다.

오명근(1873, 고종 10 ~ 1926)은 가선대부 비서원승 오석영의 아들로 1891(고종 28)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비서원승 규장각 직각을 역임하였다.

공은 을사늑약(1905, 광무 9)이 일본의 위협 속에서 강제로 체결됨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국정을 일본이 간섭, 지배하니 나라 잃은 백성이 벼슬할 수 없다고 부끄러워하며 한탄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덕봉리로 낙향하여 두문불출하면서 일제에 비협조하며 저항했다.

참고로 공의 4촌 누이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백야 김좌진 장군과 결혼했다.

오형근(1874, 고종 11 ~ 1922)은 노주 오희상의 현손으로 1981(고종 28)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 비서원승(승지)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사옹원 첨정 오경선

이며 증조는 통훈대부 합천군수 오치익이다.

공은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빼앗기자 신하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는 덕봉리로 낙향하여 두문불출하면서 일제에 무언으로 항거하였다.

오정근(1868, 고종 5 ~ 1946)은 해창위 7세손으로 1885(고종 22)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 궁내부 특진관 원임(참판)을 끝으로 갑오경장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의하면서 홀연히 은퇴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위선(爲先)사업에 헌신하였다.

오진영(1868, 고종 5 ~ 1944)은 세상에서 석농(石農)선생이라 불렀다. 일찍부터 간재 전우에게 수학했고 갑오개혁 이후 은거하여 후진을 양성하면서 도의를 지키는 데 전력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각 국 공관과 정부에 통박하는 글을 보냈다. 그 뒤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한을 작성했으나 간재 전우의 반대로 포기했다.

전간재는 오랑캐들의 협력을 부정하고 오직 도학정신을 강조하여 무모한 저항으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도학 부흥에 힘써 후일을 기약할 것을 강조하며 나라 찾는 방법으로 도학 부흥에 힘쓸 것을 역설했다. 이 때문에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한도 말렸던 것이다.

공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와 인()과 용()을 겸비한 한말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공의 위폐는 후학(제자)들이 마련한 덕봉리 경앙사에 스승 간재, 노주와 함께 모셔졌다.

 

참고문헌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해주오씨세보2013

경앙사지, 단기 4344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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