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의 분포와 안성 청룡사 Ⅰ
사당패의 분포와 안성 청룡사 Ⅰ
  • 시사안성
  • 승인 2018.08.0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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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8
19세기 중후반 사당패의 근거지
19세기 중후반 사당패의 근거지

사당패는 사찰을 근거지로 하여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송석하 선생은 사당고에서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정수사 부근,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화방사 등을 사당골이란 지명을 들어 사당의 본거지로 꼽았다.

그리고 신재효의 박타령에는 안성 청룡사, 영남 하동 목골, 함열 성불암, 창평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 월량사 등이 사당패의 근거지로 나온다. 이는 일성록비변사등록에 사당들은 삼남에 아주 많다고 기록된 부분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이처럼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하던 사당패들은 19세기 말이 되면 안성 청룡사를 제외하고는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이 모두 동시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당패가 남사당으로 바뀐 것인지에 대하여 청룡리 이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이에 사당패의 근거지인 청룡리를 통하여 사당패가 남사당패로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사당패의 근거지로 알려진 안성 청룡사는 예로부터 사당패의 총본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및 송석하, 이능화, 백화랑 등 일제 강점기 초기 연구자들의 논문 그리고 사당패의 선소리, 탈춤 대사 등 많은 자료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송석하는 안성 청룡사에서는 사당을 양성하여 전국으로 보급한 곳이라고도 하였다.

현재도 청룡리에서는 청룡사 옆의 불당골을 여덟 사당이 살던 마을이라고 하여 팔사당골로 부르는데, 이는 아마 청룡사에서 애사당을 길러 전국 팔도의 사당패에 공급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꼭두각시 놀음(황해도 봉산)
1930년대 꼭두각시 놀음(황해도 봉산)

 

. 小寺 문안이요, 小寺 등은 京畿 安城 靑龍寺嶺南 河東 목골이며 全羅道議論하면 咸悅成佛菴, 昌平에 대주, 潭陽, 玉川, 井邑, 同福, 咸平月良寺 여기 저기 있삽다가.

- 신재효, 박타령

 

. 그런데, 이 사당패는 맨 처음에 시작되기를 절()의 노비로서 되었다.

대저 큰 절에는 소위 사노(寺奴) 혹은 사비(寺婢)가 있었다.

그런데, 경기도 안성군의 소속인 청룡사는 이 사노 사비의 본원지였다.

- 백화랑, 없어진 민속 사당패(社堂牌)

 

. 항간에 전해지는 말로는 사당이라는 것은 사노비에서 비롯되었으며, 안성군의 청룡사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 때문에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손히 예를 행해서 마치 노비가 상전(우리나라 말에 노비를 하전, 주인을 상전이라고 한다)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한다고 했다.

- 이능화, 여사당패

 

. 全國 各地到處에서 볼 수 있는 寺刹附近의 사당골(Sadangkol)이란 地名이다(漢字로 쓸 때에는 各樣으로 쓴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로는 全南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一部 淨水寺 附近村落은 그들의 根據地였다. 其他 安城郡 瑞雲面 靑龍里靑龍寺社堂, 黃海道 九月山의 사당, 慶南 南海郡 古縣面 大火芳寺(실은 이것은 중매구이지만 )等 實로 이 方面으로서 본다면 그 許多하다.

- 송석하, 사당고

 

이상과 같이 판소리 및 초기 민속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대부분 안성 청룡사가 사당패의 본거지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청룡사가 사당패의 중요한 본거지라는 근거는 많이 확인된다. 사당패들에 의하여 전승된 선소리 산타령 사설에 안성 청룡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는데 경기 선소리 산타령 중 <놀량>~아하 아하~ ~열네로구나 종일가도 안성은 청룡이로구나.’, 서도 선소리 산타령 중 <뒷산타령> ‘어디로 가자고 지그렁 직신 날만 조리 조리 졸조리 따라 안성의 청룡 가잔다. 에헤~.’, 서도 선소리 산타령 중 <경발림> ‘어데로 가자고 날만 졸라 어데로 가지고 기부령 직신 날만 조리 조리 졸 따라서 안성에 청룡 가자 에에.’ 등의 예가 있다.

1930년대 꼭두각시 놀음2(황해도 봉산)
1930년대 꼭두각시 놀음2(황해도 봉산)

이들 사설의 내용은 대게 비슷한데 그 요지는 안성 청룡에 가자는 내용이다. 또 다른 자료로는 1965년 이두현이 채록한 봉산탈춤의 대사 중에 제3과장 사당춤(社堂舞)에도 비슷한 사설이 보인다.앞의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안성 청룡리는 사당패들의 중심지였는데, 그들이 없어짐과 동시에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청룡리 사당패들이 남사당패로 바뀐 것은 명확해 보인다.

심우성은 1930년대까지 존속하던 6개의 남사당패 계보에 대한 분석을 하며 안성의 개다리패(일명 바우덕이패), 황해도 안악의 오명선패, 평택 오산의 심선옥패(진위패의 후신), 안성 복만이패(안성 개다리패의 후신), 원육덕패(안성 복만이패의 후신), 이원보패(서울 변두리지역과 경기도 일원의 소도시를 순연한 안성출신)를 들었다. 이에 따르면 개다리패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 안성 청룡리패와 바로 인근인 진위패(심선옥패의 전신)를 제외하면 안성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곳은 안악(또는 은율)의 오명선패 한 곳 뿐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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