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7월 장마철에 받은 유아세례(幼兒洗禮)
1940년 7월 장마철에 받은 유아세례(幼兒洗禮)
  • 시사안성
  • 승인 2018.08.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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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5
필자의 돌 기념 가족사진(개인소장)/ 1941년 필자의 출생장소인 안성군 금광면 현수리(거리미) 자택 초가집을 배경으로 찍은 돌 기념 사진이다. 할아버지(60세 추정), 아버지(34세), 어머니(32세), 큰누나(14세), 작은 누나(5세), 필자(2세)이다. 당시 근처에 사는 안성사진관 사진사를 불러서 자택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필자의 돌 기념 가족사진(개인소장)/ 1941년 필자의 출생장소인 안성군 금광면 현수리(거리미) 자택 초가집을 배경으로 찍은 돌 기념 사진이다. 할아버지(60세 추정), 아버지(34세), 어머니(32세), 큰누나(14세), 작은 누나(5세), 필자(2세)이다. 당시 근처에 사는 안성사진관 사진사를 불러서 자택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1940년 음력 6월 장마 통에 몇 집 안되는 안성 거리미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렴풋이 생각나는 곳은 안성천 옥천교 다리 아래에 있었던 물문거리 근처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담기를 쓰기 전 확인하기위하여 안성 거리미라는 동네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았다. 그 이유는 안성시에서 발급 받은 호적등본엔 출생 장소가 안성군 안성읍 양기리 352번지로 되어 있어서 어렸을 때 들어 두었던 거리미에 대하여는 한동안 잊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적에 적혀 있는 양기리/揚基里는 장기리/場基里의 잘못된 기록으로 생각된다. 필자의 본적지가 안성군 안성읍 옥천동 12번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장터場基(옥천동, 낙원동, 창전동 등 일대)를 장기리라고 칭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2016710일자 지역신문에 게재된 봉원학 기자의 우리동네 우리마을 탐방-현수동 편을 읽어보니 안성시 현수동의 자연부락 중 하나로 거리미라는 동네가 있었다. 금광면에 속해 있었던 현수리는 1998년 안성시 승격 때 안성시에 편입되었고 지금 현수동에는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천주교신자라는 이야기를 동네 통장으로부터 들었다는 기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출생지가 궁금해서 필자가 태어나 세례를 받았던 안성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1940년 당시의 세례문서에 기록 된 영세자(領洗者) 주소지를 찾아보았다. 라틴어 필기체로 ‘Hyen-su-ri Keum-koang, Anseng'(안성군 금광면 현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해서 필자가 기억하고 있던 출생 장소를 실제로 찾아가 보았더니 현재 안성시 거리미길 14-( ) **간장게장 집 옆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의 옥천동을 끼고 흐르는 안성천 건너편 거리미에는 불과 다서 여섯 채의 집만 있었던 아주 자그마한 동네였다고 한다. 당시 장마 통에 하천 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집이고 사람이고 통째로 떠내려 갈 위험이 있는 아주 낮은 하천부지였다고 한다.

충남 공주를 떠나 안성으로 온 조부와 부친은 현수동 거리미 에 초가집을 손수 지어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 박병원(朴炳元/아명 재경)/ 거리미 자택 마루에 앉아 찍은 할아버지 사진이다(개인소장)/입고 계신 두루마기는 며느리인 어머니가 광목을 끊어다가 검정 물을 들여서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역시 사진사를 집에 까지 불러서 촬영하였다
할아버지 박병원(朴炳元/아명 재경)/ 거리미 자택 마루에 앉아 찍은 할아버지 사진이다(개인소장)/입고 계신 두루마기는 며느리인 어머니가 광목을 끊어다가 검정 물을 들여서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역시 사진사를 집에 까지 불러서 촬영하였다

한 때 천주교 교우촌인 진천 삼박골에 살았을 때 박해를 피해 넘어 다니는 배티고개를 기억하고 있었던 조부가 안성을 향해서 오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부모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더니 충남 공주 우성면엔 밀양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유교를 신봉하는 양반 자랑 종친과 친척들은 조부가 천주교를 믿어 제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이 땅에 전파된 천주교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상 제사 거부는 당시의 조정 관리들에게 박해의 명분과 빌미를 주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순교를 하였고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신앙촌을 형성하여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던 시대였다.

공주에 살고 있을 때에는 박해시대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였으나 유교를 신봉하는 박씨 집성촌에서 밥 먹듯이 돌아오는 시제(時祭)에 참석하는 일이 천주교 신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지금은 1960년대 바티칸 공의회이후로 한국의 가톨릭은 그 나라 전통문화를 존중하도록 완화되었다).

4대까지 조상들의 신주를 안채나 사랑채의 대청에 함께 모시고 지내는 제사를 중히 여기고 있는 친척들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합동으로 지내는 차례나 묘제(墓祭)에서 친척 중 천주교 신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부모 제사도 모르는 **이라는 소리를 듣고 속상해 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한 연유에서 고향 공주를 떠나 진천 삼박골에서 가까운 안성으로 피신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 박인규(朴仁圭/아명 호식)/ 아버지 젊었을 때(30대로 추정) 사진관에 가서 찍은 독사진이다(개인소장). 공주에서 안성 거리미로 와서 초가집을 직접 지으셨다고 한다
아버지 박인규(朴仁圭/아명 호식)/ 아버지 젊었을 때(30대로 추정) 사진관에 가서 찍은 독사진이다(개인소장). 공주에서 안성 거리미로 와서 초가집을 직접 지으셨다고 한다

앞 이야기로 돌아가, 거리미 바로 앞에 놓여있는 물문거리엔 물이 넘쳐흐르도록 길게 만들어 놓은 시멘트 둑 길(평소에 걸어 다니는 통행로)이 있었다.

장마철 한 여름에 아기를 가져 무거운 몸이 되신 모친은 평소에 건너다니던 물문거리가 철철 넘치는 관계로 읍내로 건너갈 수 없어 출산에 필요한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부친은 만주로 돈 벌러 가셨기 때문에 보호자 없이 출산해야 하는 모친으로서는 몸과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상상을 해 본다.

요즘같이 폭염경보 없이 다가왔을 더위에 산모를 위해 불을 때서 방바닥이 펄펄 끓었을 테니 더욱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열네 살 된 큰 딸과 다섯 살 작은 딸이 물도 떠다 놓고 출산을 돕는 바람에 큰 고통 없이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40년 음력 619(양력 723) 장마철에 태어난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읍내에 있는 성당으로 아기를 안고 가서 유아세례(幼兒洗禮)를 꼭 받아야하는 천주교 교리 상의 의무를 실행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조부는 장마철에 내린 비가 읍내로 건너다니던 물문거리를 세차게 때리며 철철 넘쳐흐르는 물목에 나가보고 난감했었다고 한다. 갓난아기를 안고 건너가기에는 이만저만한 위험이 아니라는 판단에 좀 더 멀리 있는 지금의 안성교 다리 쪽으로 돌아서 읍내로 건너가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지금 숭인동에 살고 있는 누님 박종임(92)에게서 확인 한 바에 의하면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많이 내리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조부는 갓 난 손자를 두툼한 포대기에 싸서 안고 성당으로 가기로 나섰다고 한다. 당시 14살 난 큰누나는 우산을 받치고 진흙을 밟으면서 안성교 쪽을 향해서 냇갈 둑을 돌아 읍내를 한참 만에 걸어가서 지금의 비봉산 자락에 있는 성당으로 향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키 큰 조부 혼자 안고 가는 아기를 비 맞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우산을 높이 받쳐 들고, 그 먼 성당에 까지 걸어가는 내내 팔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도 참아가며 걸어갔다고 한다.

세례성사를 받으려면 영적인 증인 대부(代父)를 한 사람 세워야 하기 때문에 주일 미사에 다니면서 알게 된 교우(敎友) 서영하(베네딕토)씨 집으로 향하였다. 마침 성당 바로 밑(숭인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안방에 들어가 아기를 눕혀놓고 잠시 쉬었다가 대부와 함께 본당 신부인 이복영(李福永)요셉신부(재직기간 1936~1942)가 집전하는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79년 전 받은 세례성사 장소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1985)되기 이전인 1922년에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지은 안성성당(사진 참조)이다.

1922. 10. 4 축성 당시 안성성당(사진/안성성당 100주년기념관 소장)/ 로마 초기 바실리카 양식으로 십자가 장식 없는 금욕적 소박한 건축양식이다. 압록강 목재와 당시 보개면 동안강당 목재를 구입하여 한국 전통 목구조로 지은 한양 절충식 성당이다/1922년 8월15일 준공하였으나 공안국신부 부임 22주년이 되는 10월에 외부 성직자 수도자 많은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린 축성식(祝聖式) 때 모습이다. 축성식은 성당 건축 때 갖는 가톨릭 준성사(準聖事) 예식의 하나이다
1922. 10. 4 축성 당시 안성성당(사진/안성성당 100주년기념관 소장)/ 로마 초기 바실리카 양식으로 십자가 장식 없는 금욕적 소박한 건축양식이다. 압록강 목재와 당시 보개면 동안강당 목재를 구입하여 한국 전통 목구조로 지은 한양 절충식 성당이다/1922년 8월15일 준공하였으나 공안국신부 부임 22주년이 되는 10월에 외부 성직자 수도자 많은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린 축성식(祝聖式) 때 모습이다. 축성식은 성당 건축 때 갖는 가톨릭 준성사(準聖事) 예식의 하나이다

성당정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오른쪽에 비치되어 있던 화강암으로 만든 8각세례대는 지금도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에 옮겨 보관되어 있다.

가톨릭교리 해설서에서 ‘8각세례대에 관하여 8이라는 숫자가 궁금하여 알아보니 하느님의 천지창조 순서에서 제 6일째 인간 창조를 마치고 제 7일째는 안식(安息)한 것으로 되어 있다.

8일째 되는 날은 인간이 활동하기 시작한 첫날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8이라는 숫자를 부여하여 세례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성지 베틀레헴 예수탄생 교회에도 제대를 바라보고 입구 오른 쪽에 8각세례대가 놓여있다고 한다.

석조 8각세례대 사진(개인소장)/ 1922년 성당 축성(祝聖) 후 세례성사 때 사용하던 세례대이다. 사진은 문화재 성당 중앙 출입문 앞에 놓여져 있던 것을 필자가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다. 세례대는 안성성당 100주년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조 8각세례대 사진(개인소장)/ 1922년 성당 축성(祝聖) 후 세례성사 때 사용하던 세례대이다. 사진은 문화재 성당 중앙 출입문 앞에 놓여져 있던 것을 필자가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다. 세례대는 안성성당 100주년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가 영세(領洗)할 때에는 세례명을 반드시 부여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는 몇 해 전 세례 받을 당시가 궁금하기도 하여 1940년 당시의 세례문서를 열람한 적이 있었다.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라틴어로 작성된 세례문서(사진 참조)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세례명이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로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어난 날짜 723일이 성인(聖人)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안성성당 교적(敎籍)에는 세례명이 암브로시오(Ambrosius)라고 적혀있다. 아기 때 있었던 일이라 확인 할 길이 없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 천주교 전례 공용어인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 세례문서(당시 신부님이 기록한 세례문서를 자세히 보니 라틴어 필기체로 옆으로 뉘어 있는 필체로 적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에 적혀있는 아폴리나리스세례명을 추후 교적을 한글로 작성할 때 사무원이 암브로시오라고 잘못 옮겨 적은 것이 아닌 가 생각될 뿐이다(실제 아폴리나리스 세례명은 거의 없고 암브로시오 세례명으로는 많이 영명되고 있다).

1940년대 세례문서 사본(출처/안성성당)/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 필자의 세례문서를 열람할 당시 양해 하에 휴대폰으로 찍은 287번째로 세례 받은 필자의 라틴어 기록 부분사진이다(안성성당에서는 이를 근거로 세례 증명서를 발급한다)
1940년대 세례문서 사본(출처/안성성당)/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 필자의 세례문서를 열람할 당시 양해 하에 휴대폰으로 찍은 287번째로 세례 받은 필자의 라틴어 기록 부분사진이다(안성성당에서는 이를 근거로 세례 증명서를 발급한다)

필자는 세례문서에 적혀있는 세례명이 본인 것이 맞는 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안성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1940년대의 세례문서를 샅샅이 뒤져보니 우선 생년월일(1940723)이 맞고, 세례일도 태어난 지 3일 후인 726일로 되어 있었다.

부모 이름도 Agapiti Ho-sik et Agathae Tchoi(박호식 아가비도와 최아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대부 이름도 Benedictus Sye(서 베네딕도)라고 적혀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세례문서 작성은 당시 본당주임 이복영(요셉) 신부가 직접 작성했으며 세례집전 사제 Yoseph B. Ri(이복영 요셉) 신부의 자필로 서명되어 있었다.

당시 안성성당 신자수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세례문서를 확인할 때 안성성당에서 당시 세례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여 보관되어 있는 세례대장 표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1940년대 세례대장 표지 사본(출처/안성성당)/ 역시 필자의 세례문서 열람 당시 세례대장 표지를 부분적으로 양해 하에 휴대폰으로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이다.
1940년대 세례대장 표지 사본(출처/안성성당)/ 역시 필자의 세례문서 열람 당시 세례대장 표지를 부분적으로 양해 하에 휴대폰으로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이다.

세례대장(LIBER BAPTIZATORUM) 6권 표지(사진 참조)1940. 1. 14~1943. 9. 18까지 영세자 No.198~600번까지 402명의 영세자이름이 적혀있고 필자는 No.287번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1940114일 이후 필자가 영세 받은 726일까지 약 3개월 동안 영세자가 287명이나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갓난아기 박종권이 태어나 세례 받던 날의 이야기를 엮어 가기 위해 세례 문서를 접했을 때의 감회는 남달랐으며 대단히 흥미로웠다.

천주교 신자는 세례 받을 때 받은 본명(세례명)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해마다 영명(領名)축일이 다가오면 생일이나 다름없이 축하를 받는다.

필자는 아폴리나리스 성인과 암브로시오 성인 두 분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두 분 성인을 존경하며 본 받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터넷 가톨릭 굿뉴스에 나와 있는 성인/축일 난에 있는 두 분의 성인을 검색해보았다. 필자에겐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는데 필요한 주보성인으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성인은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1/2세기 경 사도 베드로에 의해 라벤나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어 약 26년 동안 교부(敎父)학자로 활동하던 중 박해자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세기 경 순교하였다. 성인의 신분은 주교이며 초대교회의 순교자로서 존경 받고 있다. 성인 축일은 순교일인 723일을 정하여 경축하여 오다가 현재는 가톨릭 전례력에서 720일로 변경하여 지내오고 있다.

암브로시오(Ambrosius) 성인은 339년 독일 남서부에서 태어나 부친 사망 후 로마에서 인문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을 전공하였다. 127일 주교로 서품 된 후 집정관으로 밀라노 질서회복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연설하는 등 행정가이면서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로서 서방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다(필자는 매년 127일에 영명 축일을 지내고 있다).

주교가 된 후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신학성서 등을 연구하였고 신비신학 설교를 중심으로 이단에 빠져있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였으며 387년에는 그에게 세례를 주기도 하였다. 가톨릭계에서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敎父)인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성 그레고리오(Gregorius)와 함께 추앙을 받고 있다.

두 분 성인의 신분은 공통적으로 가톨릭 고위 성직자인 주교였으며 철학, 신학, 법학을 공부한 교부학자이다. 주보성인을 본받기 위하여 두 분의 업적을 항상 잊지 않고 본받으려고 은연중에 노력하며 살아왔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길을 택하였으며, 교장 퇴직 후 대학에서 교육학, 교육철학을 강의하는 시간강사로 대학생들과 10년간이나 만난 적이 있다. 스스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학문에 정진하는 평범한 교육인의 길을 걸었던 것은 사실이다.

안성성당 역대 주임신부(출처/안성성당 100주년사, 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2000, 10월)/ 초대는 공안국신부이고 4대 주임신부 이복영 요셉 신부가 1940년 필자의 세례성사 집전 사제이다. 이 요셉 신부는 1931년에는 초대 공안국신부의 보좌신부로 안성성당에서 재임한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성성당 역대 주임신부(출처/안성성당 100주년사, 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2000, 10월)/ 초대는 공안국신부이고 4대 주임신부 이복영 요셉 신부가 1940년 필자의 세례성사 집전 사제이다. 이 요셉 신부는 1931년에는 초대 공안국신부의 보좌신부로 안성성당에서 재임한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제까지 가톨릭 성사(聖事)와 관련된 신앙생활과 일생을 회고해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안성 구포동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고 7살 때 성체성사(가톨릭 신자로서는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은총과 자격을 얻는 예식)를 받았다.

수시로 고해성사에 임했으며 12살 때에는 견진(堅振)성사(교리를 배우지 않고 유아세례를 받았거나 세례성사를 받은 후에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베푸는 의식)를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로부터 받게 되었다(당시엔 안성성당이 서울교구 관할이었다). 그리고 196627세 되던 해에 역시 안성성당(지금의 문화재로 지정된 본성전)에서 혼인성사를 받았다.

안성에서 태어나 대학 생활 4년을 빼고는 계속해서 안성에서 살았고 교직생활도 안성을 떠난 일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느 땐가 병자성사(천주교에서 죽을 위험에 빠진 환자에게 성사의 은총으로 영혼과 육신이 치유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는 의식)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잠들게 되면 안성성당으로 옮겨져 자손들과 여러 친지,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주례사제가 집전하는 장례미사와 고별식을 끝으로 헤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혜서에 있는 성경 구절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본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 4, 9).

 

박종권(교육자)

 

 

 

 

* 덧붙이는 글 : 8월에는 개인사정으로 한 주 쉬고 격주로 원고가 나가게 됨을 필자로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편집자 주 : 7월 마지막주(730~85일까지) “안성을 말한다는 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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