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武臣)으로 명예를 떨치다.
무신(武臣)으로 명예를 떨치다.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7.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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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2

해주오씨 정무공파 가문에서는 문과를 통하여 현신(賢臣), 충신(忠臣), 공신(功臣),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관직으로는 영의정, 판서, 대제학 등이 배출되어 명문가를 이루었다.

반면 이에 못지않게 무과(武科)로도 관직에 진출해 국가에 공을 세운 훈신(勳臣), 관직으로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포도대장, 삼도 수군통제사, 삼도통어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이로 볼 때 정무공파 가문은 문무과를 구별하지 않고 각 부분에 함께 진출하여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무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와 생몰(生沒)연대

직 책

비 고

오정방(定邦)

1552년 명종 7~ 1625년 인조 3

, 경상우도 도사,

증 병

 

오중주(重周)

16545 ~ 173511

가선대부 도수통제사

봉공 손자

오재(載熙)

17273 ~ 181313

정현대부 지중추부사

부 도

봉공 현손

오문상(吳文)

176036 ~ 182020

가선대부

경상우도 도사

봉공 5세손

(致壽)

18077 ~ 1884년 고종 21

절충

경상도 수군절도사

봉공 6세손

오일선(一善)

18022 ~ 18578

함경북도

도사

부자

도사

봉공 7세손

오진(晉泳)

182424~ ?

황해도

도사

봉공 8세손

(王奕)

170935 ~ 176945

가선대부

도통제사

부자 삼도 통제사

백천

오재(載光)

174521 ~ 181313

가의대부

도통제사

백천당 현손

오재(載徽)

17317 ~ 18088

가의대부

도통어사

3

통어()

백천당 현손

오의상(毅常)

175632 ~ 182020

가선대부

도통제사

증 병참판

백천5대손

(致賢)

1793년 정조 17~ 1867년 고종 4

가선대부

도통어사

백천6대손

(應常)

176541 ~ 18077

절충

경상도 수군절도사

백천5대손

치영(致永)

1795년 정조 19 ~ 1884년 고종 21

동지중추역

백천6대손

오명선(吳明)

18099 ~ 18556

수사

부자

백천7대손

순영(順泳)

184612 ~ 1906년 고종 10

가선대부, 참판

백천8대손

 

위의 표를 보면 무과 합격자 114명 중 장원 4[오정방(吳定邦), 오치영(吳致永), 오명선(吳明善), 오순영(吳順泳)]이며, 이중 오명선(吳明善)과 오순영(吳順泳)은 부자가 대를 이어 장원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1[오재희(吳載熙)], 삼도통제사 4[오중주(吳重周), 오혁(吳王奕), 오재광(吳載光), 오의상(吳毅常)], 삼도통어사 2[오재휘(吳載徽), 오치현(吳致賢)], 병마절도사 4[오정방(吳定邦), 오문상(吳文常), 오일선(吳一善), 오진영(吳晉泳)], 수군절도사 2[오응상(吳應常), 오치수(吳致壽)]이 배출되어 명예를 떨쳤다.

이들 중에는 3대 통어()[오재휘(吳載徽), 오의상(吳毅常), 오치현(吳致賢)], 부자(父子) 삼도통제사 [오혁(吳王奕)과 오재광(吳載光)], 부자(父子) 병마절도사[오일선(吳一善)과 오진영(吳晉泳)]도 있다. 이들은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고위직에 올라 더욱 돋보인다.

여러 무신들 중 대표적으로 오중주(吳重周), 오혁(吳王奕), 그리고 오재희(吳載熙)의 활동상을 살펴본다.

오중주 장군 묘
오중주 장군 묘

(1) 삼도수군통제사 오중주(吳重周) 장군

오중주(1654년 효종 5 ~ 1735 영조 11)는 자는 자후(子厚), 호는 야은(野隱)으로 증 병조참판 오두흥(吳斗興)의 아들로 1680(숙종 6)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에 보직되었다.

그 후 계속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 춘천 부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후 1718(숙종 44)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720(숙종 46)에는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금군별장이 되었다.

이때 장희빈 소생이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되었으나 무자다병(無子多病)하여 노론에서는 속히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하여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였다. 이에 소론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후 소론은 왕세제가 정무를 대리하게 되자 노론을 공격하는 한편 역모로 무고(誣告)하여 노론 중신들이 극형을 받고 소론이 집권하는 신임사화(1721년 경종 1 ~ 1722년 경종 2)

일어나 정국이 요동쳤다.

이때 공은 호군에 있다가 쫓겨나 남원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영조가 즉위하고 소론이 축출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함에 따라 공은 1725(영조 1)에 유배에서 풀려나 포도대장, 금군별장이 되었으나 곧바로 사퇴하였다.

1728(영조 4)에는 영조 즉위로 정계에서 쫓겨난 소론의 무리들이 영조 퇴위를 계획하고 일으킨 이인좌의 난 때는 공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다시 사직했다.

그 후 한성부 좌윤, 동지중추부사, 훈련원 도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독서와 승마로 여생을 보냈다.공은 1735(영조 11)에 향년 82세로 운명하였다. 도암 문정공 이재가 지은 신도비가 있고 노주 오희상이 지은 묘비가 있다.

장흥 오혁 장군 묘
장흥 오혁 장군 묘

(2) 삼도수군통제사 오혁(吳王奕) 장군

오혁(1709년 숙종 35 ~ 1769년 영조 45)은 조선의 무신이다. 그의 가계는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으로 응교를 추증받은 오핵이 증조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공조좌랑으로 승지를 추증받은 오두용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추증받은 오창주이다.

공의 자는 대이(大而)1734(영조 10)에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52(영조 28)에 충청도와 경상좌도의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이어서 전라도 병마절도사, 삼도 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거치고, 내직(중앙 부서)으로 들어와 포도대장, 금군별장을 거쳐 훈련대장,어영대장, 총융사를 한 후 1769(영조 45)에 향수 89세로병사했다. 묘소는 양주 장흥에 있는데 족질 판중추 오재순이지은 신도비가 있다. 그의 아들 중 오재능(吳載能)은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장흥 오혁 장군 신도비
장흥 오혁 장군 신도비

(3) 평지신선 오재희(吳載熙) 장군

오재희(1727년 영조 3 ~ 1813년 순조 13). 조선시대 무신. 생부는 증 좌승지 오박(吳璞)으로 증 좌참찬 오탁(吳琢)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삼도수군통제사 오중주이다.

자는 경집(敬緝), 호는 휴재(休齋)이며 1762(영조 38)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고 향수 87세로 1813(순조 13)에 운명했다.

관직은 선전관으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훈련원 주부, 도총부 도사를 지냈고, 그 후 외직(지방관직)으로 나가 초산, 영월, 강계 부사를 거쳐 1777(정조 1)에 공충도(현 충청도)수군절도사, 1784(정조 8)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1810(순조 10)에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었다.

공은 무신이나 평소에 시율(詩律)을 즐겨 당시 주위에서는 평지신선(平地神仙)이라 불렀다. 족질(族姪) 오희상(吳熙常)이 쓴 묘비가 있다.

 

참고문헌

안성사람 안성이야기2006

한국인명대사전1986

해주오씨세보2013

노주 오희상 가학연구2010

농재집단기4331, 1982

천파문집1989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안성군지1990

조선의 문화공간2006

해창위 오태주의 서예(32회 탁본전람회 도록)한신대학교

2015

쌍백당이공 신도비명 탁본집2004

명안공주 관련 유물도록강릉시립박물관 1996

경앙사지, 단기 4344

족보식 방목열기2000(임낙정 편 동광출판사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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